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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글/황민재)

2017.07.31 14:18

관리자 조회 수:402


“온갖 실패와 불행을 겪으면서도 인생의 신뢰를 잃지 않은 낙천가는

대개 훌륭한 어머니 품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 앙드레 모로아



 

나의 어머니 불러만 봐도 가슴이 아리고 그리워진다. 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마당에서 놀다가 눈에 티가 들어가 몹시 따끔거리고 아파서 눈을 비비며 울고 있자 부엌에서 달려 나오신 어머니가 내 눈의 눈꺼풀을 벌리고 혀로 핥아 주셨다. 그러자 그렇게 쓰리고 따끔거리던 눈이 금방 시원하기 까지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초등학교 삼학년이었던 추수가 끝난 늦가을 초저녁에 어머니가 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무엇인가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초저녁잠이 많았던 나는 일찍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보니 마루에서 조용한 목탁소리와 함께 무슨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떡시루 밑바닥에 몇 둘금의 시루떡을 해놓고 그 위에 간장 담는 작은 사기종지에 참기름을 부어놓고 참종이 심지를 만들어 불을 밝혀 놓고 어머니는 하얀 소복에 두손 을 합장하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인근 절에서 오신 스님은 경을 읽고 있었다. 자식들의 무병장수와 복락을 위해 그 뒤로도 해마다 그때쯤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외에도 어머니는 새벽이면 우물에서 정화수를 길러다 장독대에 올려놓고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축원하는 모습을 가끔 보았다. 특히 편식이며 입이 짧았던 나 때문에 어머니는 무척 애를 태웠다. 여름이면 삼계탕보다 마늘계탕이 더 좋다며 양은솥에 작은 옹기단지를 넣고 그 속에 닭을 넣어 삶는 중탕으로 오래 끓인 닭고기를 옆에서 어서 먹으라고 채근했다. 그러면 맛이 없어서 어머니는 한 점도 먹지 않으면서 나만 먹으라고 한다며 앙탈을 부렸다. 그러한 나를 항시 웃으시면서 달랬다. 그러나 어머니는 때로는 무척 근엄했고 무섭기까지 했다.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 막내 동생을 괴롭히거나 주먹질이라도 하는 때에는 단번에 근엄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평소에 지지리 말도 잘 듣지 않고 제멋대로인 나는 금방 기가 죽고 조용해졌다. 그것은 아버지를 제외한 집안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형님 형수 그리고 머슴도 어머니 앞에서는 아무 말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한 어머니가 광주에서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토요일에 집에 가면 무엇을 먹일까 걱정이었으며 다음날 특별식을 만들어 옆에 지켜 앉아 다 먹으라고 채근하였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오래된 마을 앞 팽나무 밑에까지 나와서 광주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멀어져 가는 나를 가물가물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던 흰 저고리 검정치마의 어머니 모습이 가금 어제인 듯 떠오를 때가 있다.

어머니는 진사집 막내딸이었으나 무척이나 검소하고 부지런하였으며 특히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었다.

우리집에는 농사도 많았지만 누에도 많이 쳐서 해마다 명주배를 짰지만 아버지의 외출용 명주 한복 그리고 형님한복도 내가 광주 하숙집에서 덮을 이불을 남색 물감을 들여 해주었을 뿐 본인은 단 한번도 명주옷을 입은 적이 없었으며 명절이나 제사때는 흰 옥양목 치마 저고리 차림이었고 평상시에는 언제나 흰 저고리 검정 무명치마였다. 어머니는 잠시도 손에서 일감을 놓지 않았다. 긴 겨울밤 초저녁 잠이 많았던 어머니는 새벽녘에 일찍 일어나 윗목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무명실을 뽑는 물레질을 하고 있었다.

농사철에는 쉴참 점심 쉴참 저녁밥을 형수와 동네 가난한 집 아낙네들과 늘 함께 했다. 특히 남에게 베푸는 것은 유별났다. 온 식구가 농사철 마당의 평상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동네 가난한 사람이 일찍 오는 때가 있으면 어머니는 밥을 먹다 말고 “김서방 이리와요”하고 불러서 나 입맛이 없어 그러는데 “이것 와서 먹어요” 하며 얼마 먹지 않은 밥을 밥그릇 채 주었다. 그때만 해도 일제때 어려운 때라 그저 사양하지 않고 고맙다며 허겁지겁 먹었다. 그때 철없던 나는 어머니가 정말 입맛이 없어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 먼 훗날 어머니는 그렇게 적게 먹고 며칠에 한번씩 측간에 갔다는 것을 알았다. 늦은 봄보리가 누릇누릇 익어갈 무렵이면 으레 서너명씩 때를 지어 한센병 환자들이 대문 앞에 와서 구걸하기 위해 각설이타령을 하고 있으면 어머니는 지체 없이 나가 그들을 불러들여 평상에 앉히고 밥을 지어 먹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엄명이기도 하였지만 형수나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손수 하시며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겨울이면 늦가을 처음 담근 배추김치가 맨 위에 하얗게 변한 우거지를 꺼내 물에 씻어서 잘게 썰어 하루 한끼는 그것으로 밥을 했다. 물론 쌀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우리집에서는 그것을 김치 덖은 밥이라 했다. 나는 특히 그 밥이 싫어서 어머니와 늘 승강이를 했다. 그 밥을 하는 것을 언제나 형수 차지였고 부잣집에서 시집온 그는 어머니 듣지 않게 광에 항아리마다 쌀이 그득그득한데 이렇게 한다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아낀 쌀을 어머니는 동네 가난한 사람들 특히 출산을 했을 때는 큰 함지박에 쌀을 담아 똬리를 머리에 받혀 이고 그 집에 갖다 주었다.

지금도 한손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함지박을 잡고 한손은 치맛자락을 잡고 종종 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난한 친척들이 와도 그냥 보내지 않고 배낭에 쌀을 그득히 넣어 지워 보냈다. 후에 사상문제로 아버지와 형님이 집을 비울 수밖에 없을 때에도 비록 머슴은 있었지만 그 많은 농사를 어머니의 후덕 때문에 동네 사람들의 협조로 무난히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내가 광주의 중학교에 다닐 때는 어머니는 이미 초로의 노인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내가 학생복을 입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그렇게 보고 싶어 했으나 다른 어머니들처럼 젊지도 곱지도 않고 좋은 옷도 입지 않은 어머니가 싫어서 한사코 못 오게 했다. 얼마나 섭섭하였을까 지금도 가끔 그때의 내 불효를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오고 가슴이 저리다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전라남도 지방에는 위수령이 발동되고 우리집은 아버지의 사상문제로 더 이상 그곳에서 지탱할 수가 없어 가산을 정리하여 1949년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은 간척지로 일본의 각 현에서 이민 온 일본인들이 거주하며 농사를 짓던 곳이었다. 넓은 간척지에 여기저기 띄엄띄엄 집단부락이 산재해 있었다.

나는 다음해인 1950년 그때는 이중과세가 금지되어 음력설에도 학교에 가야 했음으로 설이 지난 그 다음 일요일 새벽에 광주를 출발하여 군산역에 내려 다시 버스편으로 면사무소 있는 곳까지 가서 물어물어 간척지 중간쯤에 있는 집에 이사 온 후 처음으로 찾아갔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오후 두시쯤 다시 다음날 학교에 가야하기 때문에 집을 나섰다. 날씨가 추웠다. 더욱이 간척지와 바닷바람이 세게 불었고 싸락눈까지 섞여 있어 나는 외투를 머리위로 뒤집어 쓰고 간척지의 쭉 뻗은 길을 따라 버스 타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조금 지나 자꾸 무엇인가 환청 비슷하게 이상한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흰저고리에 검정치마를 한손에 잡고 한손에는 무엇인가를 들고 나를 부르며 어머니가 오고 있었다.

나는 편식에 입이 짧아 아침 겸 점심을 많이 먹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런 내가 마음에 걸렸는지 내가 좋아하는 곶감과 대추를 접시에 담아 들고 와서 외투 주머니에 넣어주며 가다가 먹으라고 하며 어서 가라고 연신 손을 내 저었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내 평생 마지막 설이었고 내가 중학교 삼학년 이학기때였다.



그 몇 달 후 육이오전쟁이 나고 그해 십일월 우리가족은 헤어졌다. 나는 형님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 빨지산이 되었고 연로한 아버지 어머니 어린동생은 전남 영광으로 피신했으며 형수는 친정으로 갔다. 그다음 해인 1951년 늦은 봄 피신처인 영광에서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렇게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별을 쳐다보며 치성을 드렸던 자식들을, 몸채를 비롯해 사랑채 잠실채 그안에 타작을 하는 넓은 안마당 사랑방 앞의 바깥마당 안쪽에 있는 넓은 채마밭 바깥채마밭 늦가을 추수가 끝나면 풍류를 즐기시던 아버지에게 해마다 찾아오는 이웃 광산군의 “쑥대머리”로 시작되는 춘향전의 “옥중가”로 유명한 임방울 명창의 창을 바깥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동네 사람들이 밤이 이슥할때까지 듣던 그 넓은 집 손수 관장하던 그 큰 살림들을 어떻게 차마 잊고 눈을 감으셨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에 통곡이 북 받쳐 오른다 이제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만은 가지가지로 철없이 속을 썩혀 드렸던 나의 불효가 가슴을 후빈다. 창문 넘어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떠 있다. 어머니의 소복입고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 잠깐 구름사이로 보였다. 나도 이제 머지않아 어머니가 계신 그 나라로 가게 될 나이가 되었다.

어머니 그때는 이제껏 못다한 효도를 꼭 다 하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