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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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 때 멋지게 춤추시던 것을 떠올리며 수년 전 은퇴하신 선배님께 나도 춤을 배우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젊었을 적 부인과 함께 배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분의 대답은 참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배워봤자 쓸데가 없어. 콜라텍이나 가면 모를까.”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만 춤을 출 때의 그 몰아지경을 학창 시절에 잠시 맛보았던 나는 콜라텍이든 집안 어디서든 춤을 춘다는 것의 기쁨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여전하다. 물론 몇 군데 전화로 알아보기까지 했으나 마땅치 않아보였고 좀 더 찾아보리라 하던 게 지금까지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늘 떠올리는 춤이란 영화 <지중해>에서 보았던 그런 춤이다. 햇빛 쨍쨍한 바닷가 모래밭에서 한 주인공이 순전히 자기 마음속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맨발로 즉흥 춤을 추던 장면은 누가 뭐래도 내게 최고의 장면이다. 혹은 아주 어릴 적에 보았던, 어디 잔치 같은 날 어른들이 모여 앉아 밥을 먹을 때 농이 섞인 이런저런 말이 오가다 갑자기 누군가가 젓가락을 두들기고 장단에 맞추어 노래가 시작되고 고조되는 즐거운 소음 속에 또 누군가 슬그머니 일어나 어깨춤을 추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춤은 꼭 노랫소리가 들려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노래로부터 시작된다.



얼마 전에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누나.” (나는 내 동생이 누나(!)’라고 부를 때 마다 외마디 노랫소리 같은 느낌이 들어 늘 기분이 좋아진다.)

? 오랜만이네.”

누나 르네 플레밍이라고 혹시 알아?”

알지! 나 그 사람 좋아해.”(참내, 아마 그 사람 너보다 내가 먼저 알고 있었을 걸?)

미국 가수인데 유명하잖아.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 온대.”

그래? 근데 뭐?”

누나 공연 갈래?”

좋지! 그 사람이 브라질풍의 바흐 5번 아리아를 불렀잖아. CD를 하도 들어서 망가져가지고 다시 사려해도 못 구하겠더라.”(갑자기 흥분해서 말이 길어진다.)

내가 누나 표를 사줄게. 근데 조건이 있어. 우리 애를 누나네다 맡기는 대가로!”

돌보기 힘든 조카를 우리 공시생 바쁜 아들한테 다섯 시간 동안 떠맡기기로 하고 표는 내가 얻는 이상한 거래였지만 상관없었다. 클래식 음악광인 동생에다 성악을 전공한 올케는 단 하루, 한차례밖에 하지 않는 이 가수의 공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틀 휴가를 내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해서 르네 플레밍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카디스의 처녀들을 처음 들었다.

  


르네 플레밍은 자신의 유려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처럼, 무대 위에서도 기품은 있지만 결코 엄숙하지 않았다. 관객들에게 친절했고 긴장된 분위기를 날려버리면서, 앉아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자신이 부르는 노래의 파도 속으로 편안하게 빠져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레파토리도 장중하고 정적인 품격이 있는 것들보다는 대부분 극적이고 낭만적인 노래들이었다. 높이 치솟아 오르는 환희인가 하면 절절한 슬픔에 온몸을 떨다가 또 어디부터는 상대를 달콤하게 거절하면서 희롱했다. 피아노에 팔을 얹었을 때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목소리가 되었고 손을 허리에 얹거나 치마를 살짝 잡았을 때는 정말로 당돌한 아가씨가 되었다. 그녀의 노래하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빛은 과연 나 같은 사람들이 걸치고 다니는 우울 따위는 단번에 날려버릴 만한 힘이 있었다. 그 때 그 흔들리는 몸짓은 또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노래에 몸이 실릴 때 그것은 바로 춤이다. 59세인 그녀는 여전히 젊고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공연의 레파토리는 르네 플레밍에게 꼭 어울리는, 모두 사랑을 담은 것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카디스의 처녀들에 특히 매료되었다. 그 노래는 카디스라는 마을 근처의 벌판에서 캐스터네츠 소리에 맞춰 볼레로 춤을 추는 세 명의 집시 처녀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작곡자는 내게는 이름도 생소한 들리브라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야 알았지만(나는 스페인 노래인 줄 알았다)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고, 이 노래는 시인 뮈세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었다. 노랫말로 보아 그 시인이 낭만주의의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면서 진정 꿈꾸었을 만한 이야기였다. 금장을 한 귀족의 유혹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가진 것 하나 없지만 그들이 춤을 추고 있는 이 순수의 시간이야말로 낭만주의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뮈세가 꿈꾸는 시간을 우리들이라고 원하지 않겠는가? ‘나 어때요?’, ‘내 허리는 날씬한가요?’ 뽐내는 플레밍은 생의 환희를 노래하며 춤추는 처녀다. 들판 한가운데 춤추는 그 처녀는 , 보세요. 삶은 이렇게 재미있는 거에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플레밍은 우리들의 그 충만한 시간에 대한 갈망을, 바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감각을 그렇게 달콤한 목소리와 몸짓으로 카디스의 처녀가 되어 일깨워주었다.



춤과 노래는 우리의 덧없이 이어지는 일상, 무명실 같은 시간 위에 길고 짧은 기쁨을, 또 슬픔을 색으로 물들여서 아름다운 무늬를 직조해낸다. 그렇게 춤과 노래는 우리가 현실을 딛고 서서 우리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된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세상인가!(레파토리 중 하나인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의 가사)’하고 말이다. 공원 한편에서 휴대전화를 켜놓고 춤 연습을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중학생들에게 그 시간은 달콤한 자유일 것이다, 어떤 노인에게는 콜라텍에 가는 일이 자신의 아까운 시간 앞을 가로막고 선 무료함을 물리치며 맞이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춤을 추며 노래하는 시간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나 일탈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라 해도 한번쯤 르네 플레밍 같은 멋진 가수를 만나볼 수만 있다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노래를 어떻게 전혀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그런데 난 아주 작고 단순한 몸짓조차 할 줄 모르는 몸치이니 이대로라면 콜라텍도 가긴 글렀다, 그냥 가끔 이렇게 노래로 다가와 나를 감동시키는 동생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