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 home
  • 게시판
  • 오늘의 국어 이야기

구둣주걱의 외출(글/박다인)

2017.07.24 10:03

관리자 조회 수:384

  양손이 묵직하다. 한손엔 우산을 받쳐 들고, 다른 손에는 손전화기와 기다란 구둣주걱이 들려 있다. 우리 집 신발장에 있어야 될 구둣주걱이다.


  초가을에 때아닌 장맛비다. 친구와 산행하기로 약속한 날인데 낭패다.  이틀 전부터 퍼붓기 시작한 비가 밤새 내리고도 그칠 기미가 없다. 여름이 자리를 내주기 아쉬운지 뒤끝을 보여주며 가을을 조롱이라도 하는 듯이. 라디오에선 첼로 연주곡 ‘생상스의 백조’가 흘러나와 내 발길을 붙들어 놓으려 하고. 이래저래 꾸물거리다 약속시간에 빠듯해 서둘러야 한다.
음악을 들으며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비 내리는 날 등산 가방을 메고 나선 게 겸연쩍어 행인들의 눈치를 본다. 
 

\“끌끌끌! 이 비에 뭔 등산이람. 저 여자 정신 나간 거 아냐?”
대놓고 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지레 짐작을 해 본다. ‘남의 눈치를 보는 건 그때부터 지옥이고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혼잣말을 해 본다.  빨간 신호등을 노려보며 튕겨 나갈 자세를 취한다.
그제야 내 눈에 들어 온 긴 구둣주걱. 생각해보니, 현관에서 손전화기로 음악을 들으려는데 제대로 연결이 안 되어 애를 먹었다. 약속시간 때문에 마음이 바빠져  등산화를 신으면서 구두주걱을 사용하고는 깜빡하고 들고 나온 거다. 그래도 그렇지, 이곳까지 오도록 눈과 손은 멍청이가 된 건가. 또 내 의식은 어디로 외출한 거고. 집으로 데려다주기엔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고 어쩌랴, 데리고 갈 수밖에.


  할 수 없이 배낭에 찔러 넣는다. 대각선으로 쿡쿡 밀어 넣어 보았지만 어림없다. 포대기에 업힌 아기가 얼굴을 빠끔히 내민 꼴이랄까. 그동안 냄새 나는 어둡고 습한 신발장 안에서 지냈으니 이참에 바깥세상 구경시켜 달라고 나를 따라 나섰는지도 모르겠다.
지하철 2호선은 언제나처럼 북적거린다. 혼잡한 전철 안에서 배낭을 메고 움직이면 주위사람을 ‘툭 툭’ 쳐서 신경이 쓰인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뭔가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아뿔사! 얌전히 있지 못하고 어떤 남학생의 백팩 어깨끈을 낚아채고 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 녀석의 장난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가씨의 핸드백 끈을 잡고 있다. 이러다 누군가의 얼굴이라도 후려치면 어쩌고.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다.
 


  내 아이가 아기였을 때다. 들쳐업고 장을 보고 오면 손에 껌이나 막대사탕이 들려 있었다. 물건을 고를 때든지 계산대에서 계산하는 동안 잡히는 대로 집어든 게 분명했다. 난감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던 기억이다. 아무래도 구둣주걱도 오늘 단단히 한 건 할 것 같다. 아니, 경찰서에나 안 끌려가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삐죽 나온 구둣주걱을 본 친구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자초지종을 듣더니 박장대소다. 자기도 무심코 남의 것까지 가방에 챙겨 넣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다면서 위안이 된다나 어쩐다나. 가방을 열어보면 같은 것이 어느 땐 두세 개씩 들어 있다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나도 위안을 받는다.


  친구는 건망증이나 치매의 전조증상이 아닐까하며 실실 웃는다. 나는 내 집중력이 우수해서라며 우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마음이 꽂히면 밤낮을 안 가리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어서라고. 아인슈타인은 연구에 몰두하다 집에 가는 길도 잊어 버렸다지 않던가.


  숲이 속절없이 비를 맞고 있다. 갖가지 식물들이 뿜어대는 향기를 맡으며 숲속에서 여유를 가져본다. 그리고 오늘 우연히 나와 동행한 구둣주걱을 생각해 본다. 구두주걱도 한 때는 늠름한 편백나무로 자라면서 미래에 대한 꿈도 가졌을 텐데. 혹시 고향을 그리며 옛날을 회상하는 건 아닐는지. 아니면 이왕 집 떠나온 길, 숲속 고향에 남기를 바라는 건 또 아닐지.


  어쩌다 나와 인연이 되어 우리 집 구둣주걱으로 살아왔구나. 그동안 신발장에 갇혀서 신발 신을 때 너를 사용하고는 고마움을 잊고 살았지. 지금 처한 너의 운명을 탓한 적은 없었니? 나는 가끔 속상할 때면 일탈을 꿈꾸었거든. 부모님의 딸로 태어나고 자라면서 주제 넘는 꿈도 가져봤지만 지금은 이게 내 길인 듯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 이게 행복한 삶이려니 생각하면서 말이야.


  숲을 나오는 길에 잣송이 네 개를 발견했다. 웬 횡재냐 싶어 친구와 나눠 배낭에 챙긴다. 솔향이 솔솔 풍겨온다.

구둣주걱아! 네가 그 까마득한 옛날에 맡았을 향기일 수도 있으니 시큼한 신발 냄새 대신 솔향기에 취해보렴.’

다음 외출에는 또 무엇을 들고 나가게 될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억력과 판단력이 흐려져 더 황당한 일이 잦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 자락도 꺼내어 바람 좀 쐬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구둣주걱과 며칠 사라진다면 가족들이 우리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알기는 할까?

비오는 날, 어쨌거나 내 깜빡이 증상 때문에 구둣주걱이 모처럼 세상 구경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