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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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그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언제나 두려움 설렘 그리고 환희였다. 1953년 다도해의 낙도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 갔다가 그때 한참 번창하던 그 섬 끝에 있는 소금만드는 염전에 가서 염부가 되었다. 그러다가 1955년 말 염전을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때 큰아버지가 살던 그 마을에는 신문하나 보는 집이 없는 척박한 농촌이었다. 나는 염전 주인의 호의로 목포의 약국 점원으로 취직을 약속 받았다. 그 당시 목표의 약국 점원 자리는 그 섬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서울에는 일면식도 없고 더욱이 신분도 분명치 못한 상태에서 올라간다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라며 일가친척과 이웃들의 안타까운 듯 경멸의 냉소를 보냈다. 그러나 나는 몇 밤을 두려움과 설렘으로 지 세우다가 기어코 1956년 봄 서울에 도전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올라온 서울은 과연 살벌했다. 우선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나는 가장 쉬운 노동현장부터 찾아가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하기를 약 칠 개월이지나 약간 돈을 저축하여 그 돈을 밑천으로 우선 길거리에서 노점을 시작했고 다음해에는 이동식 잡화점을 차렸다



이년 후 1959년에는 종로2가 낙원시장 입구에 드디어 점포를 마련하여 과자 중간 도매점을 차리게 되었다. 그런대로 장사가 잘되어 점원을 두 명이나 두게 되었으며 거기에 동생과 시골에서 올라온 조카도 함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번성하던 중 1964년 과거 노동현장에서 알게 된 경상도가 고향인 지인이 찾아와서 이야기 하던 중 강원도에 좋은 사업이 있는데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나를 부추겼다. 그 곳은 우리나라에서 양질의 무연탄이 많이 생산되는 삼척탄좌와 그 보다 조금 적은 동원탄좌 그리고 군소탄광이 많이 있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면 고하리 일대였다. 지금은 유명한 정선 카지노 호텔이 있는 곳이다. 그때 고한까지 태백선 철도가 건설 중이었고 예미역가지 약 30키로미터가 되는 비포장도로를 무연탄을 싣고 수십대의 트럭들이 다니고 있었다. 엄청나게 많게 타이어 소모가 있었으며 타이어 판매업을 하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고한 현지에 몇 번 가보았다. 그곳은 경이로운 별천지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산림녹화 정책으로 나무를 연료로 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고 모든 가정연료는 십구공탄으로 대체되어 무연탄의 수요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화전을 일구던 산골짜기에 개천옆으로 외길 도로가 있었으며 그옆의 산자락을 깎아 집들이 들어섰고 거기에 다방을 비롯하여 음식점과 여러개의 요정도 있었으며 외지에서 온 기생들이 십여 명씩 있었다.

그 곳에는 충청도, 경기도 서울 일원에서 무연탄을 사기 위한 매탄업자들과 광산주와 차주 그리고 광산에 각종 물품을 납품하기 위해 몰려든 상인들로 늘 북적거렸다. 그 광경은 꼭 서부영화에서 나오는 광산지대를 연상케 하였고 그 뜨거운 열기는 나를 매혹시켰다. 그렇게 해서 그 지인과 나는 동업으로 한국타이어 강원도 대리점을 열었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한사람이 보통 이,삼대의 트럭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30여대의 트럭을 가지고 있는 운수회사도 있었다. 그러던 중 호사는 다마라 했던가 운수회사에 타이어를 납품하고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났다. 타이어회사에서는 더 이상 타이어를 주지 않았고 우리는 그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동업하던 그 지인과도 그의 방탕한 생활이 싫어서 결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광산지대의 호황열기에 매혹되어 그곳을 떠날수가 없었고 그 트럭들을 상대로 한 주유소를 세울 결심을 했다. 그곳에는 이미 일년전부터 운영하는 주유소가 두곳이나 있었으며 길은 외길이었다. 주유소를 세울 땅도 화전을 일궜던 밭 한 곳 뿐이었다. 300평이면 주유소를 세우는데 충분한데 그 땅은 1500평이었고 전부가 아니면 팔지 않겠다고 배짱을 튕겼다. 더구나 지금은 뒷골목의 땅도 평당 3000만원하는 마포구 서교동 땅이 당시 3000원이었는데 불과 2,3년 전만 해도 몇 십전 하지 않던 땅을 평당 1500원 아니면 팔지 않겠다고 하여 얼마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그 땅을 전부 샀다.

서울에서 나와 가까이 아는 사람들도 이 모험적 결단에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뒤에서 수근거릴 정도였다. 이번에는 주유소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 산골짜기에는 모래가 없어 건물 세울 블록을 찍는데 모래를 멀리 충북 제천에서 무연탄을 실었던 빈 화물차로 예미역까지 운반하여 다시 고한에서 무연탄을 싣고 갔던 빈트럭에 옯겨 싣고 와야 했다. 제천 통운에 의뢰하여 모래대금을 지불하고 올라왔다. 그러나 예미역까지 몇 시간이면 오는 모래 실은 화물칸이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가보았더니 제천역에서 태백선으로 갈라지는 곳에서부터 경사가 심하여 서울에서 오는 화물 열차를 다시 조성하게 되어 있었다. 겨우 역무원에게 돈을 주고 연결을 부탁하고 먼저 왔다. 그러나 또다시 중간 조성역인 영월역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마지막 예미역까지 왔으나 먼저와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무려 일주일이 너머 걸렸고 그것은 1964년의 우리나라 사회상의 한 단면이었으나 나는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 겨울이 오기 전에 주유소 건물도 세웠고 영업도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주유소에는 들어오는 차가 없었다. 이미 일년전부터 영업하던 주유소는 개인 차주들과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각 광산에서 발행하는 주유전표로 거래하고 있었다. 각 광산에서는 특별히 차주들이 원하지 않는 한 주유소를 바꿀 이유가 없었고 그때 기름값이 정부 고시가격이어서 차주들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기존 거래처를 좀체 바꾸려 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막막했다. 그러나 우리 주유소에는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다. 그곳에는 마땅한 땅이 없어 우리 주유소의 넓은 땅에서 아침이면 운전수들이 차를 세워놓고 정비도 하고 타이어도 갈아 끼우기도 했다. 운전수들이 모든 일을 했지만 차주들도 아침이면 꼭 정비하는 현장에 나와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차주들에게 다가가서 아침 인사를 하고 땅도 부담없이 아무 때라도 사용하라고 하며 친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자 차주들은 미안했던지 하나, 둘 우리 주유소로 광상기름 전표를 끊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곳 지방의 유지들과도 자주 만나 술자리도 같이 하며 유대관계도 다져 나갔다. 그런 중에 그곳에 우체국이 꼭 필요하나 땅이 없어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내가 선뜻 자진해서 내 땅 일부를 무상으로 희사하기로 했다. 우선 지방의 환심부터 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체국장이 될 사람에게는 내가 요구하는 전화번호를 약속받고 우체국이 완공되어 내가 원하는 전화번호 77번도 받았고 예상대로 지방인심도 퍽 호의적이 되었다.



그곳은 태백산맥 중턱이어서 겨울이 빨리 왔고 눈도 많이 내렸으며 매우 추웠다. 나는 검정염색을 한 미군용 파커를 뒤집어쓰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속을 걸어서 각 광산 사무실을 찾아 다녔다. 이렇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다닌 덕분인지 우리 주유소를 이용하는 차들이 차츰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눈 속을 걸으며 내가 평소에 애송하는 “롱펠로”의 인생찬가 중 한 구절을 중얼거리며 다녔다. 제5절이었다.



드넓은 세계의 전쟁터에서

인생의 야영장에서

울면서 쫒기는 짐승이 되지 말라

싸움에 뛰어드는 전사가 되라

 


몇 번이고 중얼거리다 보면 추위도 참을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봄이 되자 광산에서는 우리 주유소에 전표를 많이 보내기 시작했으며 초가을에는 주유소 하나가 폐업을 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석유공사 강원도 대리점이었던 강원석유 직영주유소에서도 우리에게 주유소를 인수할 용의가 있는지 타진해 왔다.



그렇게 해서 그 주유소도 인수를 하여 그 지역에서 완전히 독점하게 되었다. 나는 독점의 오만에 빠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을 많이 했으며 차주들에게나 광산에나 더욱 친절하고 성실하게 대했다. 그리고 이년 후 이번에는 4킬로미터 떨어진 동원탄좌가 있는 사북면 소재지에 있는 주유소마저 인수 했다. 그러던 중 1971년 여름 대홍수로 영월철교가 무너졌다. 그때까지 기름은 육로로는 오지 못하고 오직 철도편으로만 고한역까지 왔다.

운반용 트럭은 기름을 공급하지 못해도 얼마간 쉬면 괜찮았으나 광산에는 광부들이 삼교대로 24시간 채탄하고 있었으며 수백메타 지하에 언제나 바깥 공기를 불어 넣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공기를 불어 넣어주는 콤프렛샤는 한시도 멈출수가 없었다. 천재지변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 드럼통에 경유를 넣어 트럭으로 운반하여 각 광산에 콤프렛샤용 경유를 계속 공급하여 철도가 개통될 때까지 쉬지 않고 각 광산에서 채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이후로 각 광산에서는 일반 외부 상인들이 납품을 하던 윤활유 구리스 등도 모두 우리 주유소에 의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문제가 생겼다.



모 신문 현지 지국장이 우리 주유소가 잘되는 것을 보고 주유소를 하나 세우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 자세히 알아보니 상당히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그 당시 주유소 허가는 경찰서 소관이었으며 삼척 탄좌는 강원 경찰청에 막강한 영향력이 있었다. 탄좌에는 영빈관도 갖추어 놓고 계절마다 강원도내 기관장들을 초청하여 쉬어가게 했다. 나는 삼척탄좌 광산 소장을 찾아갔다. 그는 그 지방에서는 드물게 서울대학교 광산학과 출신으로 유능한 엘리트로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 내가 찾아온 이유와 목적을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설명했다. 천재지변의 어려움 속에서도 손해를 감수하며 기름을 공급하여 광산의 채탄 작업이 하루도 쉬지 않게 한점과 이제까지 우리가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차주들에게나 광산에나 한번도 불편하게 한 일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성실하게 의무를 다하는 업체를 건실하게 키워야 하는 것이 맞는가 경쟁을 시켜서 부실하게 만드는 것이 사회정의에 맞는가를 물었다. 수긍하고 내 면전에서 바로 강원도 경찰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새로 세우려는 주유소는 허가해 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청했다. 그러면서 저 쪽에서 무어라 하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놓으며 웃으면서 허가되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더 열심히 하시라고 격려해 주었으며 대홍수로 어려울 때 기름을 차질없이 공급해주어 고맙다고 치하의 인사까지 해 주었다.



드디어 나는 고한 사북지역 광산지대를 완전히 평정하고야 말았다. 나는 광산에서 내려오면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난 오년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 산골짜기에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이순간의 가슴 절인 환희까지 다 되새기며 날아갈 것 같던 가벼운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