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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글/김만석)

2017.07.10 11:07

관리자 조회 수:624


에밀 졸라(1840-1902년)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토목 기사였던 아버지는 이탈리아 인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 인이었다. 졸라는 22세 때 프랑스에 귀화했다. 졸라는 대학자격시험에 실패한 후 한동안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궁핍한 생활을 하지만 시인이 되기를 꿈꾸기도 했었다. 1862년부터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첫 단편 <나농에게 주는 이야기>를 출간해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고, 1866년에는 출판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루공 마카루> 시리즈는 1871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했는데 출간되자마자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유명 작가 대열에 올라섰다.



<나는 고발한다!>는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쓴 시론인데 <로로르> 또는 <르 피카로>에 실렸던 글과 매체에 싣는 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팸플릿으로 세상에 알렸던 시론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졸라가 자신의 명예, 자신의 인생을 걸고,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든 것을 이해하는 데는 그 사건의 진상부터 파악해보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싶다. 공개한 ‘나는 탄핵 한다’라는 제목의 논설로 사건이 재현됐고, 에밀 졸라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에 대한 의혹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보수와 진보의 물러설 수없는 결전장이었다. 반드레퓌스파 선동가들이 교회와 귀족의 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사회적 낙오자들을 반유태주의, 반의회주의, 군주주의 운동에 끌어들였고, 드레퓌스파 지식인들은 실질적으로 반드레퓌스파가 장악하고 있는 국가권력 및 이들에 의해 조종되는 군중심리 즉, 만연한 국민감정과 이중의 싸움을 벌여야했다. ‘나는 고발한다!’ 발표 이 후 졸라는 예상대로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곤 했었다.



1894년 12월 19일 군사 법정에서는 참모본부 소속 유태인계 드레퓌스 대위의 간첩사건에 대한 재판이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었다.
“피고는 스파이 혐의로 피소되었다. 군사 기밀을 적군에게 넘긴 사실이 있는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기 명세서가 있다. 이것이 피고가 적군에게 넘기려던 기밀문서다. 3명의 필적 감정사의 감정 결과 피고가 쓴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렇게 증거가 명백한 데 아니라고 부정하는가?”
“그 명세서에 대해서는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피고는 왜 기소되었다고 생각 하는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유태인이기 때문이겠지요.”
“피고는 인종 차별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 군사 재판은 드레퓌스 대위에게 간첩혐의를 씌워놓고, 만들어놓은 각본대로 연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적인 절차일 뿐 피고가 어떠한 대답을 하든 아무런 의미는 없는 것이다. 법정에는 23명이나 되는 장교가 드레퓌스를 생매장할 증언을 하러 나왔는데, 이들은 모두 국방부 소속이었다. 이것은 이번 군사 재판이 한통속인 가족 재판이었음을 말해준 셈이다. 이 재판에서 국방장관 메루시에 장군이 재판관들에게 불법적으로 전달한 ‘비밀자료’가 배심원들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군적박탈과 종신유배를 선고받고, 유형지인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도’로 가게 된다.

유태인들은 유럽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으면서 오랜 세월 유랑생활을 해온 터라 이들에게는 토지가 없었다. 유태인들의 전통적 치부수단은 대금업이었다. 유태인들이 왕정복고 이후 프랑스 자본주의의 발달과정에서 금융자본가로 성장한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금융자본가로 성장했지만 대금업, 금융, 증권투기 등은 유태인들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제3공화국 초기 보수적인 유태인 금융가들이 공공연히 취한 왕당파지지 태도는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의 반유태 감정을 부채질 했다. 그리고 1890년 전후해 터진 희대의 뇌물 스캔들, 파나마 운하회사 사건은 극단적 반유태주의 감정을 일반화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파나마 운하 뇌물사건이란 프랑스 제3공화국 초기에 일어난 정경결탁 스캔들이다. 스에즈 운하를 완성한 프랑스인 레셉스가 1881년 파나마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가 여러 가지 난항에 부딪혀 1888년 파산하게 되는데, 파산하기 직전 그의 파나마 운하 회사가 공채발행의 입법화를 시도하면서 많은 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1892년 반유태계 신문이, 여기에 몇몇 유태인이 연루되었다고 폭로하면서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졌다. 이로 인해 여러 명의 의원이 퇴진했고, 반유태주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 유태인은 역시 혐오스러운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 1870년 보불 전쟁에서 제2제정의 프랑스가 비스마르크 독일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프랑스에서는 격심한 대독 적대감이 만연해 있었다. 이 당시 프랑스의 대외 정책은 온통 독일을 향한 복수에 집중되었었다. 이 같은 적대감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치열한 첩보전을 촉발시켰고, 이런 와중에서 몇몇 정보원이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당시에는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군대에 대한 국민적 의전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1880년대 후반 군부의 상징인 블랑제 장군을 국민의 지도자로 옹립하려는 블랑제주의가 기세를 떨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영광을 부르짖는 내셔널리즘은 19세기 말 알라스 로렌(독일과 프랑스가 번갈아 차지했던 지역) 지방을 회복하려는 국민적 염원과 함께 광풍으로 부활한다. 이런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다. 따라서 동전의 양면 같은 반유태주의와 내셔널리즘의 고려 없이는 드레퓌스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1896년 프랑스 참모본부 정보국은 일명 ‘푸른 엽서’라는 수상한 속달우편 한 통을 입수했는데 수신인 이름이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 당시 막 정보국장이 된 피카르 중령은 즉각 에스테라지 소령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에스테라지 소령이 드레퓌스 사건에서 문제가 된 명세서의 진짜 작성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직속상관인 참모 총장 부아테프로 장군과 참모차장 공스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 오판을 바로잡을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을 묵살해버렸다. 피카르 중령은 양심적인 인물로서 의무를 다했다.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상관들에게 건의했고 간청했다. 그들의 직무유기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역설했다. 이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그것은 엄청난 폭발력으로 세상을 강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896년 9월 드레퓌스 부인이 재판 절차의 불법성을 이유로 의회에 재판 재심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재심을 원하지 않았던 신임 국방장관 비요 장군은 피카르 중령을 격리시킬 목적으로 정보수집이란 미명하에 그를 동부전선에 이어 튀니지로 추방한다. 1897년 6월 튀니지에서 파리로 돌아온 피카르는 친구인 르불루아 변호사를 만난다. 이들은 주점에 들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오랜 만에 우정을 나누면서 회포를 풀었다. 한동안 술잔이 오갔다.


“아, 참 오랜 만이다. 그동안 파견 나가서 재미는 좋았겠지?”
“흥, 재미는 무슨...... 추방당한 신세였는데.”
“추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르불루아는 눈을 크게 뜨고 피카르의 얼굴을 바라본다. 피카르는 술을 한 잔 더 들이키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건 절대 비밀인데 말이야, 비밀을 지켜준다면 말해줄 게.”
“알았어, 얼른 얘기해봐”



피카르는 비밀을 조건으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마음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엄청난 사건을 알게 된 르불루아는 한 동안 비밀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냥 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때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양심적인 정치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상원 부의장 쉐레르 케스트네르였다. 르불루아는 쉐레르 케스트네르를 찾아가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었다. 이리하여 드레퓌스 사건의 소문은 정치권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 때 사람들은, 이제 곧 쉐레르 케스트네르로부터 충격적인 무언가가 폭로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정보를 쥐고 있는 쉐레르 케스트네르는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어떤 세력에게서 엄청난 돈을 받았을 것이라는 유언비어도 퍼져갖다. 상원 부의장 직위마저 흔들릴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2주간이나 버텼다.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사건에 책임 있는 자들이 반성하고 스스로 고백할 기회를 주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런데 사건에 책임 있는 이들 장군들은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것을 안지 일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무시무시한 진실을 숨기는 데 급급하고 있었다. 쉐레르 케스트네르는 비오 장군에게 국가적 재앙으로 변해가는 이 사건을 확실하게 장악해서 더 이상 악화시키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참모본부는 이미 저질러진 범죄를 고백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드레퓌스가 무죄가 되면, 이 일을 꾸민 참모본부가 단죄되어야 한다. 참모본부가 궤멸되고, 사건에 연루된 많은 부하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냥 유태인 하나 희생시키고, 참모본부를 살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쉐레르 케스트네르는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1897년 11월 15일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 드레퓌스에게 에스테라지 소령을 공식적으로 고소하라고 권한다. 마티외 드레퓌스는 고소하는 편지를 비요 장관에게 보낸다. 에스테라지는 비밀통신에 의해 참모본부와 긴밀한 대책을 논의했고, 필적 전문가들은 참모본부의 압력으로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에스테라지의 것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에스테라지의 재판이 열리든 날 메르시에 장군은 군 법정 상석에서 부하들에게 ‘기왕의 판결을 존중하라’고 명령함으로써 군사 법정이 에스테라지 소령에게 무죄 선고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결국 군 법정은 에스테라지에게 만장일치로 무죄 석방했다. 에스테라지는 이미 문제의 명세서를 자기가 조작한 것이라고 자백한 터였고, 앙리문서의 조작자 앙리 중령은 영차에서 의문의 자살을 했다. 누가 봐도 에스테라지는 유죄가 될 수박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군사 법정은 만장일치로 무죄 선고를 했고, 팔짱을 낀 채 법정에서 나오는 에스테라지를 군중은 열광적인 환호로 맞았다. 아무리 군사 재판이지만 이것은 재판이 아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황당한 재판을 보고 울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테라지의 무죄 석방은 예상대로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의 대립을 격화 시켰다. 특히 에밀 졸라는 이 혐오스러운 판결을 계기로 드레퓌스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판결 이틀 후인 1898년 1월 13일 <로로르>지는 언론사상 가장 유명한 기사가 된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루 씨에게 보내는 편지> 즉 ‘나는 고발한다!’를 일면 톱기사로 실었다. 그날 <로로르>지는 평소 판매 부수의 10배가 넘는 30만부를 찍었지만 삽시간에 동이나버렸다. ‘나는 고발한다!’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대통령 각하!
지금까지 찬란했던 당신의 명성에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더렵혀지지 않을까 염려 됩니다. 군사 법정은 에스테라지라는 자, 모름지기 진실과 정의에 대한 최대의 모욕인 이 자에게 이제 막 감히 ‘명령에 따라 무죄를 선고 했습니다. ~ 중략 ~


“대통령 각하! 정직하게 살아온 한 시민으로서 솟구치는 분노와 더불어 온몸으로 이 진실을 외치는 것은 바로 당신을 향해서입니다. 저는 명예로운 당신이 진실을 알고도 외면하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국가 원수인 당신이 아니라면 제가 도대체 누구에게 진범들의 악랄한 죄상을 고발하겠습니까?” ~ 중략 ~
“우리는 필적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들 중 한 명인 고베르 씨가 참모본부의 의도대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기에 험악한 처우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스물 세 명의 장교가 드레퓌스를 생매장할 증언을 하러 왔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국방부 소속이었다는 사실, 말하자면 모두가 한통속인 가족 재판이었던 셈입니다.” ~ 중략 ~


졸라는 이 공개 문을 통해서 군부의 비리를 조목조목 규탄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범법자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고발한다.


“도대체 모든 것을 재조직하고 쇄신할 진정 강력한 정부, 슬기로운 애국 충정의 정부는 어디 있는 것일까요? 이 나라는 저열한 음모와 비방과 횡령의 보금자리가 된지 오래입니다. 실로 모든 것이 광기, 기괴한 상상력, 비열한경찰 근성, 종교 재판식의 매도, 전제적인 폭압으로 뒤흔들렸고 몇몇 장교와 장성들의 영달을 위해 국가 전체가 강철군화에 짓밟혔으며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는 국가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질식 되었습니다.” ~ 중략 ~



에밀 졸라가 고발한 범법자들
뒤파티 드클랑 중령 : 사법적 오판의 악마적 생산자 역할, 그의 음모에 의해서 사건이 비롯되었다.
메르시에 장군 : 금세기 최악의 범죄의 공모자 역할을 했다. 국방장관으로서 재판관들에게 불법적인 ‘비밀문서’를 전달하여 배심원들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비요 장군 : 드레퓌스의 무죄와 관련한 명백한 증거를 쥐고 있으면서도 참모본부를 구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것을 묵살했다.
세 명의 필적 전문가 : 날조된 거짓 보고서 작성
국방부 : 여론을 오도하고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특히 <레클레르>와 <레코드 파리>를 통해 가증스러운 언론 캠페인을 벌렸다.
첫 번째 군사 법정 : 비공개 서류에 근거해서 피고를 유죄 선고했다.
두 번째 군사 법정 : 상관들의 명령에 따라 첫 번째 군사 법정의 불법성을 은폐하기 위해 진
실을 알고도 범죄자를 무죄 석방하는 사법적 범죄를 저질렀다.

“제가 고발한 사람들에 관한 한 저는 그들을 알지 못하며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그들에 대해 원한이나 증오를 품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제게 사회악의 표본일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의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수완일 뿐입니다. ~ 중략~
‘나는 고발한다!’가 게제 된 이후 청년 학생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결 더 강한 결속력을 보였고,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며 재심청구에 서명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프랑스가 서구 문명의 전위였던 만큼 프랑스의 불의를 바라보는 세계는 불안과 함께 심한 구토를 느꼈다.



1898년 9월 각료회의가 드레퓌스 부인의 재심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자료가 프랑스 최고 재판소인 파기원으로 넘어갔고, 파기원은 격론 끝에 1898년 10월 마침내 재심 요청을 받아들였다. 재심 개회지로는 렌이 선정 되었고, 1899년 8월 마침내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렌의 한 고등학교에서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이 열렸다. 재심이 진행되는 동안 드레퓌스의 변호인 라보리 변호사가 거리에서 총격을 당하는데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2개월 전 이미 에스테라지가 자신이 문제의 명세서 작성자라고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1899년 9월 9일 군사 법정은 5대2로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정함으로써 다시 한 번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결국 군부와 정부는 참모본부와 드레퓌스를 다 살리기 위한 고육책으로 유죄 확정과 사면을 생각해낸 것이다. 1899년 9월 19일 대통령 에밀루베는 수순에 따라 드레퓌스를 사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는 드레퓌스 사건의 사법적 종결을 의미했다. 그런데 사면이란 것은 죄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드레퓌스가 받아들였던 사면을 드레퓌스파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다. 드레퓌스가 사면을 수용한다는 것은 곧 그의 무죄를 초지일관 주장했던 피카르를 곤경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드레퓌스파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정부와 의회가 드레퓌스파를 진정시키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카드는 이른바 사면법이었다. 드레퓌스의 사면 이후 15개월이 지난 1900년 12월 의회는 사면법을 통과 시켰다. 요컨대 사면법은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사건 관련자들을 사면함으로써 가능한 논쟁을 원천 봉쇄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드레퓌스파는 사면법 통과를 시민에 대한 반역 행위로 규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드레퓌스파에게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복권은 1906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1906년 7월 12일 파기원은 마침내 드레퓌스에게 내린 유죄선고는 오류였음을 만천하에 선언했으며 그 이튼 날 의회는 드레퓌스와 피카르의 군대복귀 법안과 졸라 유해의 팡태웅 이장 법안을 가결했다. 드레퓌스와 피카르의 복권은 곧 자유와 정의, 진실의 복권을 의미한다.

1898년 1월 13일 ‘나는 고발한다!’를 기점으로 사람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단순한 수사 드라마가 아니라 프랑스의 현제와 미래를 결정짓는 대하 역사 드라마로 읽기 시작했다. 드레퓌스와 피카르에게도 상징적인 보상은 이루어졌다. 드레퓌스에게는 레지옹 도뢰르 훈장이 수여됐고 피카르에게는 새 내각 수반의 천거로 국방장관에 발탁된다. 정의의 역사 창조는 졸라에게 실로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던 것이다.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든 후 졸라 개인적인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경제적 사회적 손실이 컸다. 재판비용, 망명생활, 집필 시간의 부족 등은 그를 파산상태로 몰고 갔다. 특히 망명 중일 때 세 명의 필적 감정사들로부터 명예훼손죄로 고소되어 궐석재판에서 벌금과 이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받았었다. 그로인해 재산이 압류되고 경매에 들어가 완전히 거덜 나기도 했다. 그리고 졸라의 의문의 가스중독사는 그가 치른 마지막 대가가 아니었나 싶다.


졸라는 한 시대의 영웅이었다. 세상에는 제2의 졸라 제3의 졸라가 자꾸 나와야 한다. 세상은 정의로운 것만도 아니고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졸라가 세상에 나온다면 무엇을 고발할까? 아마 승자 독식하는 세태부터 고발하지 않을까?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 은, 동메달의 가치의 차이를 두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0,01초 차이 가지고도 엄청난 가치의 차이를 두는 것은 부조리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무기를 발전시키는 것을 위업으로 삼고 있는 미치광이를 고발할 것이다. 지구인은 지구를 지킬 의무가 있다. 그래서 지구를 살리는 일에는 너와 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자기 나라 이익에 위배된다고 뒤로 빠지는 속 좁은 대국을 고발할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테러집단을 인류의 이름으로 규탄할 것이다. 중국한테는 무어라고 할라나? 등치는 크지만 속 좁은 짓만 한다고 등치 값 좀 하라고 충고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