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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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기(글/박다인)

2017.04.03 10:02

관리자 조회 수:1669

엿보기

박다인

 

언제부턴가 지하철을 타게 되면 엿보는 취미가 발동한다. 터널 속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관심을 갖고 상상도해보며 이야기를 엮어본다. 비록 잠깐 스쳐가는 인연이지만 그들의 다양한 일상을 함께 느끼며 호흡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 아닐는지.


출근시간이 지나 조금은 헐렁해진 지하철 안. 나의 두 눈이, 귀가, 촉이 재빠르게 360도 회전 중이다.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고 승객들이 채 내리기도 전에 들소 떼처럼 올라 탄 사람들이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마침 내가 앉아있는 맞은편에 한 자리가 비었다. 아니 비어있다고 볼 수 있으려나. 잠 삼매경에 푹 빠진 청년의 가방이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여인이 청년 앞으로 다가와 멈칫멈칫하더니 남자를 슬쩍 건드린다. 하지만 어림없다는 듯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어찌할까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 자리를 뜬다. 혹시 소심한 그녀라면 주위 시선에 민망했을 터. 잠시 후 아줌마가 다가서더니 자는 청년의 팔을 툭 친다. 그녀의 힘이 제대로 먹혔는지 그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가방을 자신의 무릎 위로 얹는다. 역시 뭐든 적극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오나보다. 청년도 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 아줌마도 곧 수면모드가 된다. 가늘게 코까지 골며 자는 그 청년은 내릴 목적지에서 제대로 내릴 수 있었을까.


다른 자리에 젊은 여인이 앉아있다. 그녀는 얼굴 단장하느라 손놀림이 분주하다. 밋밋했던 얼굴판에 타닥타닥 뽀얗게 분칠을 하고 쌍꺼풀진 눈 위에 브라운 톤으로 색을 입힌다. 눈을 한껏 치뜨고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꼼꼼하게 말아 올린다. 의식을 치루는 듯한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도톰한 입술에는 이내 붉은 꽃송이로 돋아난다. 화장을 끝내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진다.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변신하는 그녀를 슬몃슬몃 쳐다보고 있다. 처음부터 쭉 지켜봤을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까. 은밀함 속에 감추어져 신비스럽게 보이는 게 여인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위 시선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가 나는 왜 마뜩찮을까. 남들이 보든 말든 화장도구를 펼친 그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치장이었을까.


한 남성이 손전화기로 통화 중이다. 무엇을 부탁하는데 상대방이 호락호락하지 않나 보다. 점점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친구사이에 그거 하나 못 들어 주냐며 언성을 높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안 되는지 목소리를 낮춰 다시 간절하게 애원한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편편치 않다.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면서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얼른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럴 땐 전화로 하는 부탁보다 진실한 눈빛으로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질 때 더 효과적일 듯하다. 그는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내린다. 친구는 그의 부탁을 나중에라도 들어주었을까.


며칠 전, 출근시간대라 지하철 안이 복잡했다. 내 옆자리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앉아 있다. 그때 청년 앞에 서 있던 얼굴빛 고운 여학생이 갑자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동시에 그는 얼른 자리를 내어주며 앉으라고 권했다. 어찌된 일인지 여학생은 계속 자리를 사양하고 청년은 또 앉으라고 권하고. 간신히 추스르고 일어선 그녀가 다시 휘청거리며 쓰려지려 했다.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가 내리려는지 힘겹게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 청년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승강장 벤치로 부축해 간 그녀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지하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사람들을 쏟아내고 새로운 승객을 태우자 곧 출발했다. 그 둘의 모습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어디가 아프냐? 어디까지 갈 거냐?” 아마도 이런 질문과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을까.


왜 그녀는 끝끝내 자리를 사양했을까. 그는 아마도 바쁜 출근 중일 텐데 왜 그녀를 선택했을까. 어찌 되었든 그렇게 할 수 있는 둘의 모습이 아직도 아름다운 여운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내가 만약 그 여학생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쯤 두 청춘 남녀가 어떤 인연으로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유행가 가사처럼.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들을 갖가지 사연과 함께 실어 나른다. 그곳은 시간과 편리함을 담보로 승객들의 모습이 민낯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오늘도 바쁜 일상 속의 사람들이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넓은 세상 속으로 썰물처럼 흩어진다.


지하철 안에서 서로 마음 빗장을 열어 함께 배려하고 수용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마음 아픈 일보다는 가슴을 따뜻이 보듬는 아름다운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오늘도 지하철 안의 사람들을 엿보며 자꾸만 그들의 모습이 내 눈에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