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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탄(風樹之嘆)(글/김정복)

2016.09.05 10:47

관리자 조회 수:1188

아들 내외가 직장에서 휴가를 얻었다며 아침에 차를 몰고 찾아왔다. 삼복 무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방에서 답답하게 지내시지 말고 시원한 곳에 다녀오자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푹푹 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 때, 어디 시원한 곳이라도 한번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텔레파시가 통한 모양이다. 평소에도 아들 내외는 가끔 시간이 나면 우리 부부를 차에 태워 바람을 쐬어주고 우리 부부가 알지 못하는 맛 집을 찾아가 맛있는 음식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곤 했었다. 그래서 오전에는 남산자락에 위치한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가서 유치원생인 손녀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을 함께 다녀오기로 하였다.

 

오전 중 우리 부부는 동심으로 돌아가 손녀딸이 이끄는 대로 놀이방을 옮겨 다니며 첨단 디지털시대의 여러 가지 새로운 정보들을 눈으로 체험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어린 손녀는 무척 재미있다며 놀이에 열중한 나머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두한다. 배가 출출하여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이제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고 손녀딸을 구슬려 식당으로 갔다. 아들은 방송에 소개되었다는 유명 맛 집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우리는 시원한 남산 숲을 코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오후에는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이동하여 저녁 6시까지 이곳저곳을 구경하였고 귀가 길에 백화점에 들러 아들로부터 저녁식사를 대접받았고, 며느리로부터는 건강식품을 선물로 받았다. 아들의 차를 타고 구경을 다닐 때마다 고맙고 감사하여 행복감에 젖으면서도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미안하고도 죄송스런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은 내 어머니에 대한 회상과 함께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나 자신의 고뇌와 회한이다.

나의 어머니는 지금 살아계시면 꼭 백세가 된다. 일제 강점기인 1916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서 열아홉 앳된 나이에 스무 살 농사꾼에게 시집와서 마흔 셋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고된 농사일을 손수 하며 자식 6남매를 제 앞가리기에 부족함 없게 잘 키워낸 훌륭한 어머니다. 어느 자식인들 낳아주고 길러준 제 어머니를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마는 내게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에 대한 남다른 애잔한 추억이 있기에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 6남매 중 유독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골골대던 나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날 어머니의 속을 썩여드렸을까를 생각하면 이 땅에서는 다시 볼 수 없게 된 어머니에 대한 가슴 절절한 한을 표현할 길이 없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이다. 고개를 네 개 넘어서 삼십 리 길을 걸어 나가야 읍내가 나오는, 그래서 동네 이름도 네보름’-보름달이 고개 넷을 넘어야 우리 마을을 비춘다는 뜻-이라는 두메산골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일제의 억압 통치가 극에 달했던 소위 말하는 대동아전쟁이 발발한 해였다. 당시 먹을 게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혹독한 굶주림 속에서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 갖은 고생을 겪어야 했고, 날이 갈수록 착취와 압제를 더해가는 일제하에서 출산 후에는 더욱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 했다. 해방을 맞아 이제 좀 살길이 열리는가 싶었는데, 그것도 잠시 6·25라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터져 온 겨레가 춥고 배고프고 가족이 헤어져야 하는 암울한 세월이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의 어머니는 아이 여섯을 키우느라 그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아비 없는 자식 버릇없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 한편으로는 엄하게 훈육하면서도 자식에 대한 속사랑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한 나는 사시사철 잔병을 몸에 달고 살았는데, 해마다 여름이면 학질이라고 하는 말라리아에 걸려 금계랍(키니네)이라는 약을 먹어야 했는데 그 약이 얼마나 썼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몸서리가 처진다. 또한 자주 이질에 걸려 복통과 구토와 설사를 하여 몸이 형편없이 야위었었다. 의약이 형편없었던 그 시절, 더욱이 산골 마을이라 병원이나 약국을 이용하기가 어렵다보니 병이 나도 집에서 앓으며 재래식 요법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온갖 잔병에도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천운이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유년기를 지나고 중학생이 되면서 나의 잔병도 떨어져 나가고 건강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읍내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공부에 재미가 붙어 학교 공부는 항상 앞자리를 차지했고, 가정 형편도 조금씩 나아지면서 미래에 대한 나의 꿈도 커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방에서는 꽤 알아주는 인문계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을 하였다. 나는 밤을 새워가며 공부에 매달렸다. 이대로라면 서울의 명문대학에 기대를 걸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 아버지께서 암 진단을 받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 년을 못 넘기시고 그해 겨울 하늘나라로 가시고 말았다.

 

이때부터 나의 어머니는 우리 집의 가장으로서 온갖 대소사를 책임져야 했다. 희망에 부풀어 있던 우리 가정에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일 년 후, 이번엔 내가 폐결핵이라는 당시에는 암과 같은 불치병으로 간주되었던 전염병에 걸려 도립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어머니는 집안일을 도맡아 해내면서도 매주 이 못난 아들을 면회하러 삼십 리 길을 멀다 않고 찾아오셨다. 아들의 병에 좋다는 음식이며 한약을 다려가지고 그 험한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들판 길을 걸어서 오셨다. 어려운 살림에서도 자식만큼은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온갖 정성을 이 자식에게 쏟아 부었다.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입원한 지 열 달 만에 나는 건강이 회복되어 퇴원을 했고 복학하여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할 때 원장 선생님이 내게 들려주신 말씀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학생, 너무 걱정하지 마. 앞길이 구만리 같은데 실망하면 안 돼. 금이 간 시루도 철사로

잘 동여매고 조심해서 사용하면 새 시루 못 지 않게 오래오래 요긴하게 잘 쓸 수 있어.

무리 하게 공부하지 말고 건강관리 잘 해.”

그 후 나는 무리하지 않으려 신경을 많이 썼고, 금주금연을 실천하며 살아왔다. 대학공부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여 월남전에 참전까지 하였고, 제대하여 직장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과로를 하기도 했지만 병이 재발하지 않았고 비교적 건강하게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퇴직을 했으니 어머니의 정성과 하늘의 도움이라고 생각한다.

 

20002월 말 나는 35년간의 교직을 은퇴하고 자유의 몸이 되어 집에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내게 되었다. 그간 직장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을 소홀히 했던 것을 조금이나마 상쇄한다는 마음으로 가정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그간 못해드린 효를 조금이라도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종종 어머니를 자가용에 태워 바람도 쐬어드리고 온천에도 모시고 갔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행복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시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런데 우연찮게 해외 봉사활동을 나가야 할 일이 생겼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한국교육원으로부터 한국어를 가르칠 강사가 필요한데 김정복 선생이면 좋겠다되도록이면 빨리 와 주었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딱 일 년만 봉사하고 돌아와 어머님 잘 모시겠다고 하고서는 출국하였는데 생각과는 달리 계속 일거리가 많아지고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현지 사정 상 뿌리치고 돌아 올 수가 없었다. ‘금년만 봉사하고 귀국해야지.’ 하면서 눌러 앉곤 하였다. 집으로 전화를 할 때마다 어머니는 밝은 목소리로 내 걱정은 말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오라고 오히려 격려를 해 주시는 것이었다.

 

해외봉사 8년째인 20092월 어느 날, 밤중에 한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입원중인데 오빠를 자꾸 찾는다는 막내 누이동생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전화를 받고 불길한 생각에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제발 건강해주십사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다음날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인천공항 도착 즉시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말에 기운을 내어 병상에서 일어나 앉으셨다.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눈물만 흘리셨다. 어머니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당시에는 잘 몰랐다.

 

어머니는 차차 건강이 좋아지셨고 일주일 후에 퇴원하셨다. 그리고 한 주일이 더 지난 후 어머니는 내게 난 인제 괜찮으니께 에미 걱정 말고 다시 돌아가서 일해.”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래요, 어머니. 이번에 가면 빨리 일 끝내고 돌아올 테니까 제가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말씀드리고 봉사현장인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갔다. 알마티에 돌아간 나는 정말 이번 학기를 끝으로 봉사활동을 마무리하고 귀국해야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하나하나 귀국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38일 아침 누이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지난밤 057분 어머님이 운명하셨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 이럴 수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다리가 후들거리며 현기증이 엄습해왔다.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귀국길에 올랐다. 영결식장인 병원에 들어서니 검은 상복을 입은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상오신 분들은 어머님이 장수하셨고 6남매의 효를 받으셨으니 호상이라며 우리 가족을 위로했지만 나로서는 불효의 한을 삭이지 못하고 눈물만 삼켰다. 해외봉사를 핑계로 어머님을 가까이서 모시지 못했고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니 참으로 불효막심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머니에 대한 모정이 새롭고 어머니 생전에 잘 해드리지 못한 불효가 뇌리를 스치며 한이 됨을 느낀다. 이제와 후회한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어머님이 살아 계신다면 잘해드릴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으로 가슴에 젖어드는 슬픔을 참을 길이 없다. 특별히 오늘처럼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마다 어머니께 못 해드린 생각에 죄송스러운 마음이 솟아나곤 한다. 옛글에 나무가 고요하려 해도 바람이 그치질 않고, 자식이 모시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말이 있는데, 꼭 나를 두고 이르는 말씀이다. 퇴직하면 어머님 모시고 팔도유람하며 어머님 호강시켜드리겠다고 마음먹었었고, 해외봉사활동 마치고 귀국하면 어머니께 못다 한 효도를 다해야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했건만, 이제는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오늘 아들 내외와 함께 바람을 쐬고 돌아오면서 새삼 7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불효막심한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풍수지탄(風樹之嘆)의 한을 또 한 번 마음속으로 삭여야만 했다. “어머님, 부디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시고 반세기 만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천상의 낙을 영원히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