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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안트(글/황민재)

2016.09.05 10:46

관리자 조회 수:1108

자이안트는 1957년 쯤 한국에 상영된 미국영화이다. 주연 배우는 그 유명한 “록 허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리고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신인배우 “제임스 딘” 이였다. 얼마 후에 요절한 “제임스 딘”은 많은 영화애호가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영화의 줄거리는 광활한 서부 택사스의 목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남자 주인공 “록 허드슨”은 그 목장의 주인이었던 누나의 죽음으로 막대한 목장의 상속자가 된다. 그런데 그 목장의 집주인의 유언으로 많은 하녀들과 목동들에게 각각 얼마씩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새 목장의 주인이 된 “록 허드슨”은 하녀들과 목동들에게 땅값을 치러 주고 땅을 모두 회수했다. 그러나 목동이었던 “제임스 딘“은 주인의 요청을 거절하고 땅을 갖겠다고 하여 그 땅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불어 닥친 유전개발 열풍으로 그 땅에서도 유전이 개발되어 막대한 부를 얻게 되고 지방의 명사가 되었다.



나는 특히 이 영화중에 “제임스 딘”이 주인의 요청을 거절하고 밖에 나가 자기 땅이 된 그 곳에 가서 망루에 올라 넓은 땅을 바라보며 그 땅의 주인이 된 감격에 겨운 모습과 자기 땅을 확인하며 “저 택사스”라는 주제곡의 은은한 멜로디에 맞춰 경계선을 뛰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린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감격한 것은 나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1953년 10월 육이오 전쟁 중에 부모도 잃고 학교도 중학교 3학년을 끝으로 중단하고 재산도 모두 없어졌다. 의지할 곳 없던 나는 하는 수 없이 신안군 다도해의 한 낙도에 있는 큰 아버지 집으로 찾아 갔다.
그 섬에는 우체국도 없고 병원도 없는 곳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나룻배를 타고 면사무소가 있는 큰 섬으로 가야 한다. 만약 조금 센 바람만 불어도 바로 배가 움직이질 못해 발이 묶였다. 섬이지만 외부의 큰 섬에 둘러 쌓여있어 어항도 없는 척박한 조금의 땅 밖에 없는 가난한 섬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큰 아버지 집에 양자로 가 있던 큰 형님도 징용으로 나가고 큰 집에는 그 당시에는 노년 축에든 환갑이 된 큰 아버지가 유일한 농사꾼이었다. 내가 가서 측은해하면서도 새 일꾼이 생긴 것에 은근히 반기는 눈치였다.

약 보름이 지나고부터 우선 산에 가서 땔 나무를 해오는 일부터 시켰다. 나는 몸도 그렇게 튼튼하지 못 했고 지게를 져 본 일도 없었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본 일도 없어 그 일이 너무 서툴고 힘들었다. 남들은 하루에 오전 오후 두 번씩 땔 나무를 해오는데, 나는 점심때가 훨씬 지난 오후 3시 경에야 겨우 한 짐을 다 채우지 못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큰 아버지는 한 겨울 농한기에 할 수 있는 갖가지 일을 시키셨다. 그러면서도 항시 못 마땅해 하셨다. 음력 정월 보름이 지나면서 보리밭에 퇴비를 지게로 저 날라 깔아주기 시작했다. 작은 고개 너머에  있는 보리밭에 퇴비를 지고 가는 지게질은 너무도 큰 고역이었다. 그리고 음력 이월이 지나면서는 논갈이를 시작하였다.



가끔 이웃 큰 섬에 사는 큰 아버지의 외손자가 왔다. 나보다 두 살이나 아래지만 모든 농사일도 잘했고 쟁기질도 썩 잘했다. 그 때부터 큰 아버지는 기대가 무너지셨는지 구박이 심해졌고 밥만 축낸다고 하시면서 음식 차별까지 시작이 되었다.
음력 삼월 초면 비교적 따뜻한 남쪽 섬에는 봄이 시작되어 우리 부락 앞에는 바다에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염전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마을 앞 야산에 염전을 만들기 위한 측량사들과 여러 명의 기술자들이 묶는 임시 숙소가 마련됐다.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어 그 숙소에 찾아가 내가 할 수 있는 무슨 일이라도 시켜달라고 주인에게 사정사정했다. 주인은 딱한 듯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 일꾼들 밥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묻기에 시켜만 주면 잘하겠다고 응낙하고 거기에서 주인과 한 방에 자면서 밥을 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양은솥에 밥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까닥하면 밑에는 타고 위에는 쌀이 익지 않아 생쌀로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물과 불을 조절하는 법을 터득하여 밥을 잘 짓게 되었다.


그런지 얼마 후에는 동네 인부들이 나와 측량사들과 기술자들의 지시에 따라 지게로 흙을 퍼 나르며 염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오전 오후에 나가 인부를 점검하고 다음 날 새벽이면 주인을 따라서 일어나 일꾼들의 전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왔다. 전심전력을 다 했다. 주인은 무척 부지런한 사람으로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주인이 깨우기 전에 주인을 따라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주인이 한 번도 나를 일부러 깨워본 적이 없었다. 나는 건강도 좋아졌고 주인의 신임도 두터워졌다. 중요한 물건을 두는 곳의 자물통과 열쇠는 나에게 맡겼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주인이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쩌다 부락에 나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너의 주인 잘 있느냐?’ 또는 ‘너의 주인 목포에서 왔느냐’ 등이다. 어떤 날은 목포 주인댁에서 가져온 반찬 빈 통을 지게에 지고 가면 ‘너의 주인 목포에 가나 보구나.’ 하고 묻곤 했다. 그러던 중 염전 축조가 끝나고 측량사들과 기술자들도 떠나서 내가 밥을 해줄 일이 없어졌다.

그 곳에서 만 10개월이 지나 섬 맨 끝에 있는 숙식이 가능한 다른 염전으로 가서 염부가 되었다. 염전 사장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육이오때 피난 나왔다가 염전을 일으켜 사장이 됐다.


그 사장은 나에게 퍽 자상했고 내 처지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 사장은 목포의 자기 집에서 구독하는 신물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염전에 내려오면서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동아일보”였다. 나는 그 신문을 읽으면서 멀고 넓은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뒷산에 혼자 올라가 서해 바다 먼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고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그 붉은 불기둥 속으로 멀리 지나가는 큰 배들을 보며 언젠가는 나도 저 배들이 가는 곳으로 가고 싶은 꿈을 꾸며 가슴을 조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염전 사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사고무친의 서울에서의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밥을 굶는 일도 있었다. 노동판에서 사정하여 미장공 조수 노릇도 했다. 한여름에 얼음과자 통을 메고 골목을 돌며 얼음과자 장사도 했다. 더위가 가시자 다시 노동판에 가서 일을 했다. 겨울이 닥쳐와서 노동일도 할 수 없어 남의 식당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던 동생을 데려와 북아현동 산 위에 있는 무허가 집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에 미군이 머물고 있던 조선호텔 앞 북창동 거리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7개월쯤 지나서 서울의 뒷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이동식 점포를 마련했다. 군대에서 전선을 감았던 통을 반으로 쪼개어 두 바퀴를 만들고 그 위에 판자로 만들었다. 속칭 “딸딸이 구루마”였다. 낮에는 앞의 위, 아래 문을 열어 각종 잡화를 진열하여 놓고 장사를 하고 밤에는 물건을 정리하여 안에다 넣고 위, 아래 문을 닫아 잠그고 밑에는 겨우 기어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그 속에서 잠을 잤다. 낮에는 딸딸이 수레를 끌고 무교동 인도에서 장사를 하고 밤에는 지금의 “교보빌딩” 대각선으로 지금은 없어진 국제극장 뒷골목에 세워 놓고 잠을 잤다.


그 때에 국제극장에서 상연된 영화가 “자이안트”였다. 나는 중학교 학생일 때도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낮에 동생에게 점포를 맡겨 놓고 그 영화를 두 번이나 관람했다.


그리고 밤이면 점포 문을 닫고 잠잘 수 있는 뒷골목으로 밀고 가면서 나는 이제 주인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이동식 딸딸이 수레에 얹은 판자 점포이지만 내가 당당한 주인이라는 자부심과 그 뿌듯한 환희에 젖어 “제임스 딘”이 자기 땅을 확인하며 가볍게 달리던 모습을 흉내 내어 나도 가볍게 어깨를 실룩거리며 주제가인 “저 택사스”를 흥얼거렸다.



나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주제가의 가사와 멜로디를 잊지 않고 어쩌다 가끔은 나 혼자 가볍게 어깨를 흔들며 조용한 소리로 불러본다.

끝없이 넓은 이 땅 살기 좋은 곳
젊은 가슴 뛰게 하는 자유의 천지
오늘도 밝은 해가 나를 부른다.
정열의 택사스
아름다운 택사스
내 사랑하는 택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