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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기술인가?

프롬은 이 책에서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예술-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갈망하고는 있지만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은 나이가 들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 받을수 있는가?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남자들은 성공해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버는 것이고 여성은 몸을 가꾸고 치장을 하는등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


남녀가 공용하는 매력전술은 유쾌한 태도와 흥미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고 원만하게 처신하는 처세술이다. 현대 문화인 특징적 성격은 구매욕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릴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현금 또는 카드로 사는 맛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다. 남녀의 합일의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가장 격앙된 경험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폐쇄적이고 동떨어져 있어서 사랑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의 경우라면 특히 놀랍고 기적적인 경험이다.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착각에 불과하다.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다.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기술습득과정은 둘로 나눌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 둘째는 실천의 습득이다. 이론이 실습에 의하여 숙달되었을 때 기술은 습득되는 것이다.

 

2.사랑의 이론


1)사랑은 인간의 실존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프롬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남녀간의 사랑으로 보고 있다.

인생에는 철학자들이 본질이라고 부르는 그런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매순간 선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갈수 있다고 정의하고 잇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정의 한곳에 프롬은 사랑이라고 답하고 있다.


프로이드와의 사랑의 논쟁에선 프롬은 철저히 성경을 발판으로 하여 사랑을 해석해 나가고 있다. 인간이 불안하고 고독한 것은 창조시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이란 해석이다.

완전한 해답은 대 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 인간적 융합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이다. 이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발광 또는 파괴-자기파괴 또는 타인파괴-가 일어난다.

사랑의 이론에 대해 말할 때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써 말할 것인가? 공서적 합일 사랑의 미숙한 형태에 대해 말할것인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공서적 합일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에서의 합일이다. 어머니와 태아는 둘이면서 하나다. 이곳이 공서적 합일이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임상적 용어로는 피학대 음란증 masochism이다.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는 지배임상적 용어로는 가학성 음란증 Sadism이다.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다시 말하면 명령하고 착취하고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가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받고 착취당하고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다.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능동적 감정과 수동적 감정, 곧 행동과 격정으로 구별한다. 능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자유롭고 자기감정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수동적 감정이 될 때 인간은 쫒기고 자기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동기에 의해 움직여지는 대상이 된다.


선망, 질투, 야망 온갖 종류의 탐욕은 격정이다. 사랑은 행동이며 인간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고, 이 힘은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행사 할 수 있을 뿐 강제된 결과로써는 결코 나타날 수 없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 감정이다.

가장 일방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하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대부분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써 따라서 즐거운 자로써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 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남성의 성 기능의 절정은 준다는데 있다. 남성은 자기 자신을 여자에게 준다. 오르가즘의 순간에 남자는 정액을 여자에게 준다. 여자도 자기 자신을 준다. 받아 드리는 행위에서 그녀는 주고 있는 것이다. 주는 행위가 불가능하다면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 환자다.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지식, 자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 없다는 뜻이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안수 없다.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사랑에 보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모성애에서 가장 명백히 나타난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누군가를 위해서 일하고 무엇인가를 키우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며 따라서 사랑과 노동은 불가분의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노동의 대상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일하기 마련이다. 희생 노력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은 책임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응답한다. 형제의 생활은 형제의 일일뿐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제 동포들에게도 책임을 느낀다. ‘사랑의 세 번째 요인은 존경이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며 결코 지배의 소산이 아니다.


사랑의 네 번째 요인은 지식이다. 우리는 인간과 우주의 비밀을 결코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지식이다. 프롬은 인간의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사랑, 합일에의 열망을 실현하는 사랑에 대해 말해왔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그 사이에서 합일에 대한 욕구가 일어난다. 이러한 양극성의 사상은 본래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었으나 두 몸으로 갈라졌고 그때부터 모든 남성은 여성이라는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다시 그녀와 결합하려고 한다는 신화에 선명하게 표현되어있다.

 

2)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무조건적이다. 아버지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고 어린아이에게 세계로 들어서는 길을 지시해주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본성에는 복정은 중요한 덕이고 불복종은 중요한 죄라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따라서 복종하지 않으면 그 벌로 아버지의 사랑을 잃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기 보다는 참을성이 있고 관대해야한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 들여야만 하고 내 마음에 들고 싶다면 너는 너의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3. 사랑의 대상


a. 형제애

사랑의 모든 형태의 바탕에 놓여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은 형제애이다. 프롬은 형제라는 말로 책임, 보호, 존경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등을 나타내고 있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b. 모성애

모성애는 어린아이에게 살려고 하는 소망뿐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길러준다. 이러한 사상은 성서에도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약속된 땅-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넘처흐른다 고 묘사되어 있다. 꿀은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은 줄 수 있으나 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 일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여야 한다. 삶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불안도 감염된다. 이 두 태도는 어린아이의 퍼스널리티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만 먹은 자와 젖과 꿀을 먹은 자를 가려 낼 수 있다.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어린아이의 성장을 돌봐주는 것이며 이것은 그녀로부터 어린아이가 분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 모성애에서는 한 몸이었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c. 성애

성애는 완전한 융합, 곧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우선 성애는 흔히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 곧 그 순간까지도 낯선 두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이 갑자기 부서져 버리는 경험과 혼돈된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친밀해지는 이러한 경험은 본질적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은 자발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의 결과이며 거역할 수 없는 감정에 갑자기 사로잡힌 결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 곧 의지-깊이 생각하고 선택 결심하여 실행하는 능력-라는 요인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코 판단이고 약속이다. 감정은 생겼다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내 행위 속에 판단과 결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곧 성애는 특수한 두사람 사이의 독특하고 완전히 개인적인 매력이라는 견홰와 성애는 의지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견해는 모두 옳다.

 

 

3.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현대 서양사회는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 그려 놓은 상, 잘 먹고,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한 생활, 오늘 즐길 수 있는 일을 내일로 연기하지 말라. 오늘날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는 전제하에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데 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 담배, ,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사랑이 성적 쾌락의 소산이라는 것과 두사람이 서로 성적으로 만족시킬 줄 알게 되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사랑은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며 성적 행복은 오히려- 심지어 이른바 성의 기교에 대한 지식조차도-사랑의 결과이다. 성적으로 억압된 사람이 공포나 증오에서 벗어난다면 그의 또는 그녀의 성적문제는 해결된다. 만일 공포나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성의 기교에 대해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로이드에게사랑은 기본적으로 성적 현상이었다. 경험에 의해 성적-생식적-사랑이 최대의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고 그 결과 성적 관계의 과정에서 행복을 찾고 생식적 에로티시즘을 자기 삶의 핵심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인간은 본성상 경쟁적이고 상호간 적으로 가득 차있음을 증명하듯 프로이드는 인간이 모든 여자를 정복하려는 무한한 욕망에 쫒기고 있고 오직 사회적 압력만이 이러한 욕망을 행동화 하는 것을 저지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활을 무한한 성적 만족에 바친 남자들 그리고 여자들도 행복을 획득하지 못하고 대체로 신경증적 갈등이나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자본주의 정신은 절약을 강조하는 대신 낭비의 강조로 어떠한 욕망이든 충족을 지연시키지 말라는 것이 모든 물질적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적 분야에서도 주류가 되었다. 상호 성적 만족으로서의 사랑과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 피난처로서의 사랑은 현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두 가지 표준적형태다.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오류다. 어떠한 환경 밑에서든 고통과 슬픔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류다. 갈등이 전혀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갈등이 사실은 진짜갈등을 피하려는 노력이라는 사실에 있다. 갈등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건전한 갈등은 두 사람이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인격적 생활의 향상을 갖게 해준다.

 

 

 

4. 사랑의 실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가르쳐야 하겠는데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다. 우선 기술의 실용에는 훈련이 요구된다. 훈련된 방식으로 기술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기술에 숙달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의 기술의 숙달의 문제는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한 훈련의 문제가 된다는데 있다.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데 필수조건은 정신집중, 훈련, 인내 끝으로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사랑의 기술에 있어서는 명장과 애호가의 비중이 애호가 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지는 것 같다.


5. 독후감

현대에 이르러 세계 어디서나 가장 처참하게 평가 절하되고 있는 것은 사랑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랑의 고갈을 느끼고 있다. 인간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에서, 연인들 사이에서 사랑이 자취를 감추고 관습과 계산이 대신 들어선 것은 언제부터일까? 프롬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사회가 시장의 교환원칙에 지배받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치도 결국 경제적 교환 가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지혜도 돈으로 환산되고 아름다움도 돈으로 환산되고 돈으로 사고 팔수 있고 더구나 사랑따위는 이제 감각적 쾌락 내지는 매음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은 개탄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나는 반항한다. 나는 존재한다.’ 카뮈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유는 지옥이라고 한 사르트르의 말을 음미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인간이 방황하는 존재, 자유로운 존재, 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까지도 옛이야기가 되지는 않았고 또한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참된 자아- 이것을 실존이라고 부르든, 다른 말로 부르든 용어나 개념에는 개의치 말자 의 상실에서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원인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프롬은 인간이 참된 자아를 상실한 것이 사랑을 상실한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사랑이 없는 인간관계의 황량함, 사랑이 결핍된 사회의 처참함 진정한 사랑이 없는 부부관계의 의례성은 누구나 절감하고 있다. 사랑하려고 해도 안된다. 사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랑에 실패하고 점점 더 고립되고 더 뼈저린 고독을 느낀다. 분리 상태에서의 불안과 고독이 두려우면서도 이 상태를 벗어날 길이 없다. 여기서 이제 사랑은 자연적인 일이 아니라 기술적 문제가 된다. 참으로 나를 주는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이러한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은 기술의 미숙성에 있다. 사랑의 기술을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밝혀놓은 것이 바로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