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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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슈마허는 1911년 독일의 본에서 태어나 1차 세계대전과 공황을 겪으면서 궁핍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슈마허는 1950년부터 20년간 영국 국립석탄위원회 자문을 맡는다. 이때 재생 불가능한 자원에 기반을 둔 서구 문명의 종언을 예언했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다. ‘굿 워크는 슈마허가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묶은 책이다.

 

1. 한 세기의 종말 앞에서.

 

1973106일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이 폭탄선언을 하게 된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무기로 석유를 이용할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석유 생산량을 매 달 5~10%씩 줄여나갈 것이다.” 이 선언으로 석유 수입국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국제 석유경매시장에서 입찰가격이 계속 올라 수 주 만에 197050% 뛰었던 원유가격보다 네 배까지 뛰었다. 산유국들이 원유 생산량을 줄이자 국제 원유가가 여섯 배 폭등했다는 점과 함께 이제는 인류 역사상 석유를 그토록 펑펑 쓰던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머지않아 산유국의 원유도 바닥이 날 것이 아닌가.

 

현대식 농업시스템은 석유 의존적이다. 대량 저가 석유, 즉 화석연료 덕분에 고도로 석유 의존적인 현대식 농업시스템이 가능했다. 그리고 짧은 기간 대량 석유가 낳은 또 다른 결과는 바로 흉물스러운 도시의 출현이다. 도시 팽창의 발목을 잡았던 식량공급 문제가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학 연료를 이용하게 되면서 해결된 것이다. 농촌의 1인당 생산성이 급격히 증가하여 5명이 100명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면 5명 만 농촌에 남고 95명은 도시에서 살 수 있다.

그런데 도시는 석유라는 에너지를 계속 넣어 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기계다. 유가가 뛰면 도시생활이 점점 무거워지고, 대량 생산체제도 바뀔 수밖에 없다.

 

2. 산업사회의 4대 죄악.

 

현대 산업사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사람들의 정신과 시간을 과도하게 앗아간다. 사실상 현대 산업사회에서 참된 여가는 노동 시간을 절약해주는 기계의 증가량과 오히려 반비례 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54)

현대 산업사회의 근본 목표는 노동을 만족스럽게 만드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오로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산업사회의 관리 방식 자체는 매우 독재적이다. 산업사회의 독재적인 운영 방식이야말로 인간을 책임 있는 개인이 아닌 오직 생산의 요소로만 취급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은 품위 없는 삶이 되었다.

 

산업사회의 네 가지 주요 본성

1. 광범위하게 복잡한 본성.

2. 탐욕, 시기심, 욕심과 같은 치명적인 죄를 끊임없이 부추기고 이용하는 본성.

3. 노동에서 품위와 만족을 없애버리는 본성.

4. 과도하게 큰 규모로 인한 권위주의적 본성.

산업사회의 사악한 본성은 오로지 이윤 확대만을 추구하는 기업들로 인해 더욱 악화된다. (60)

 

3. 거대 기술의 노예가 되다.

 

부르즈아 계급은 시골을 도시의 규율에 굴복시켰다. 거대한 도시가 생겨났고 인구 집중과 생산 수단의 중앙 집중화가 일어났으며 부는 소수의 손에 집중되었다. (76)

18~19세기 동안 기술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런데 새로운 기술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뒤를 밀어줄 때만 개발될 수 있었다. 만약 사유건 공유건 간에 대기업이 지배하는 체제라면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기술도 거대해질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대다수 보통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주거와 같은 기본 욕구에 대해서는 안중에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국이라는 미국의 1인당 평균 소득은 영국이나 서유럽보다 두 배나 많지만, 미국인들은 유럽보다 훨씬 더 비참한 빈곤에 시달린다. 세계 인구의 5~6%에 지나지 않는 미국인들이 전 세계 천연자원 생산량의 35%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전연 행복하지 않다. 막대한 부는 특정한 곳에만 쌓여 있고, 나머지 도처에 존재하는 극도의 불행, 비참, 절망, 투쟁, 범죄, 도피 등이 미국인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 여기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자원과 가장 뛰어난 과학기술을 지닌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처음에는 거대기업, 거대정부, 거대학계 같은 상부 구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다가 결국은 이 모든 상부 구조의 토대인 기술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85)

 

도시에 맞도록 개발된 거대기술은 소도시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런 기획은 경제성이 없다는 뜻이다. 현대 기술은 대량 생산을 촉진하며 고도로 복잡하고 대자본이 든다. 이 기술은 대도시나 메갈로포리스에만 잘 들어맞을 뿐 다른 곳에는 잘 맞지 않는다.

슈마허는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방법을 모색했다. 좀 더 작은 규모에 잘 맞는 기술만 개발한다면 문제 해결이 어려운 건 아니라고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4. 복잡하게 만드는 바보, 단순하게 만드는 천재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헐값이던 화석연료 덕분에 기술은 네 가지 방향에서 잘 못 접어들었다. 먼저, 모든 것이 점점 커지는 경향이 있고, 기술 분야에서도 단위가 점점 커지고 있다. 두 번째로, 물건을 점점 복잡하게 만드는 흐름이 생겼다. 고장 나면 수리하기 힘 든다. 세 번째 흐름은 앞 선 두 가지와 연결된다. 생산에 드는 자본 비용이 점차 증가하면서 실제로 무슨 일을 하려면 그에 앞서 먼저 부자가 되거나 세력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영농을 예로 들면 현대식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자본이 많이 들어 먼저 부자가 되어야 한다. 기술 발전의 네 번째 흐름은 기술의 폭력성이다.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폭력적인 태도가 계속 증대해왔다. (99)

지난 수백 년 간에 걸쳐 기술 발전이 점점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지고, 더 자본집약적이며, 더 폭력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올바른 진단이라면 치료 방법은 분명히 정반대 방향에서 찾아봐야 한다. 19세기만 해도 작은 규모로 쉽게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지금은 작은 규모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모든 물건을 다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 물품들은 가능하다. (100)

 

지금까지 폭력적인 방향으로 기술 발전이 진행되었다면 이제 비폭력적인 방향에서 살펴보자. 여기서 비폭력이란 자연체계를 강제로 거스르지 않고 생태적 원리들을 존중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노동하는 생산양식을 말한다. 폭력적인 방식으로는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그로 인해 더 많은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가난한 사회는 이런 폭력을 감당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부유한 사회(혹은 영역)라 해도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103)

 

5. 좋은 경영을 위한 안내.

 

다양한 기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소규모 사업체가 많이 있는 나라에서는 이 사업체들이 별다른 사회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소규모 사업체는 단독으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소규모 사업체에 가장 잘 맞는 조직은 사기업 방식이다. 자신을 책임질 사람이 분명히 있으면 인간과 물질 간에도 실존적 관계가 생긴다. 일거수일투족이 엄청난 사회.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거대 공장이나 거대 기업을 개인이 소유하게 되면 반대의 다른 극단으로 간다. 이 경우 사적 소유권이란 기업 생존에 필요한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소유주는 자산과 실제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 마치 파리에 살면서 소작농이나 노동자들로부터 불로 소득을 챙겼던 프랑스 혁명 전의 봉건지주들과 매우 흡사하다. (117~118)

 

6. 작지만 위대한 실험 중간기술.

 

최선만을 쫓는 시대 흐름에 휩쓸려 최선을 누릴 형편조차 안 되는 이들에게서 그들이 누려야 할 차선마저 앗아가면 안 된다. (140)

빈곤상태에 있는 개발도상국에 가장 잘 맞는 적정기술은 중간이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괭이와 트랙터의 중간을 말한다.

슈마허는 인도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서구식 무분별한 경제개발이 그 과실은 소수에게 돌아가고, 반면 그에 따른 고통은 대부분의 약자들이 떠맡게 된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무차별한 자연 파괴로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연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없었고,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값싼 물건으로 지역의 장인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으며 도시 노동자들은 비인간적인 노동에 시달리느라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상실하고 있다. (245)

결국 인도 민중들이 겪는 고통은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무분별한 산업화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슈마허는 서구식 대량생산이 아닌 지역 고유의 자원을 이용한 지역적 생산양식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는데 여기에 필요한 기술을 적정기술내지는 중간기술이라고 불렀다. 중간기술이란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을 기계에 종속시키지 않으며 중앙집권화나 관료주의적 운영 방식을 낳지 않는 작은 단위의 기술을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권력자나 기술전문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기 지역의 자원으로 스스로를 도울 방법과 여기에 적합한 도구 개발에 필요한 기술이 바로 중간기술인 것이다.

중간기술에 대한 슈마허의 관심은 현대기술이 우리 삶에 끼치는 막중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줄 지혜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현대 과학기술은 너무나 전문적이고 자본집약적이며 규모가 거대해서 약자들에게 삶의 지혜를 주지는 못 하면서 오히려 약자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247)

 

슈마허가 몸담고 있는 중간기술개발그릅은 지난 10년 간 중간기술 문제를 연구해왔다. 어떤 분야든 시도할 때마다 모든 게 완벽하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거대한 공장을 세우는 대신 생산 규모가 작은 100개의 공장을 자원과 수요가 있는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켜 지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7. 작은 일터가 일자리를 만든다.

 

잔치는 끝났다.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말이 아니고, 지난 수백 년 동안 값싸고 풍부한 화석 연료와 몇 가지 환상 덕분에 우리 사회에 형성되었던 어떤 특이한 생활방식이 이제 끝났다는 의미다.

세 명의 위대한 마법사 혹은 요술쟁이가 잔치를 즐겁게 만들었다. 첫 번째 마법사는 모든 자연 법칙을 깨고 유한한 환경에서도 무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 이 환상은 오랫동안 많은 공격을 받아왔고 결정적으로는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로 완전히 깨져버렸다. 이제야 인류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 컴퓨터가 알려준 것이다. 두 번째 마법사는 기괴한 자연법칙을 들먹이며 아주 적은 임금으로도 단순하고 지겨운 일을 계속할 노동력이 무한이 공급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환상은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에 대해 가졌던 환상과 유사하다. 이제 노예들은 깨어나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없으면 더는 잔치를 벌일 수 없으며 자신들이 주인보다 훨씬 더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권력 관계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나라마다 시차는 다르지만) 세 번째는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인데 이 마법사는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과학이 개별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A라는 것을 해결하면 다른 새로운 문제들이 무더기로 생겨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마법사들이 모두 가짜이고 환상이라고 밝혀졌는데도 아직도 우리는 이들이 되돌아올 것처럼 서로에게 주문을 건다. 그러나 이들은 돌아올 수 없다. 풍부한 화석연료와 언제라도 등 떠밀려 조립라인에 배치될 수 있는 노동력 덕분에 지금의 기술이 나왔기 때문이다. (167~168)

 

중국의 모습은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환이다. 수십 년 간 죽을 정도로 병약하던 거대한 나라가 갑자기 한 세기 만에 탈바꿈하고 있다. 사람들은 먹고 즐거워하고,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단조로워도 적당한 의복을 입고,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건강하고 쾌활하며 명랑하다. 1920~1930년대의 중국과 비교해보면 기적과 같은 전환이다. 물론 매우 가난한 사회지만, 가난해도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사회다. (170)

 

 

서구식 경제학은 외국에서 더 싸게 들여올 수 없을 때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말라고 말한다. 풍요로운 환경을 가진 푸에르토리코에서는 당근을 미국 텍사스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텍사스 산 당근이 자국 산보다 값이 더 싼 이상 푸에르토리코 농부들은 당근을 제배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시스템이다.

중국인들은 이것을 뒤집어버렸다. 중국인들은 자기가 만들 수 없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외국에서 사들여 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더 싸게 사 올 수 있다고 생산하지 않으면 발전은 저하된다. 확실히 만들어낼 수 있는 한 사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도전하게 만든다.

중국인들의 대전환은 실천을 통해 배운다는 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편협한 극좌파들처럼 오직 노동자만이 안다는 뜻이 아니다. 마우저둥의 가르침에 따라 관리자나 지식인도 현장에 나가서 노동자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다음 현장에서 배운 것을 가져와 연구하여 이론을 만든 뒤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노동자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과정이다. 노동자로부터 배우거나 혹은 관리자로부터 만 배우는 식으로 반쪽이 되면 이론은 무용지물이 된다. (173)

 

8. 일의 즐거움이 없다면 삶의 즐거움도 없다.

 

좋은 노동이란 무엇인지, 좋은 노동을 위한 교육은 무엇인지에 대해 의미 있는 토론이 되려면 먼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오는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분명히 생각해봐야 한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자신의 정신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현대 과학은 아무런 대답을 못한다. 하지만 이 불행한 존재의 육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최선을 다해 살라고 말이다. (189)

 

슈마허는 가난한 나라 버마에서 오히려 서구 문명의 문제점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불교경제학을 통해 서구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까지 깨닫게 되었다. 경제에 관심을 가져야할 진짜 중요한 문제는 물질이 아니라 바로 인간임을 자각하면서 경제 문제를 도덕적 혹은 종교적 관점에서 성찰하게 되었다. 적게 원했기 때문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버마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은 경제의 본래 목적이 물질적 번영이 아닌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안식을 얻는데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최소한의 자원으로 꼭 필요한 재화만 생산하는 버마의 불교경제와 급증하는 환경오염에도 불구하고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악순환 속에서 남아돌 만큼 재화를 생산하는 세계경제를 비교하면서, 슈마허는 말한다. ‘참된 문명이라면 무엇보다 지속 가능해야 한다.’라고.

불교경제학은 재생 가능한 자원과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구별한다. 임업이나 농업에서 나온 생산물처럼 재생 가능한 자원에 토대를 둔 문명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석유나 석탄, 금속과 같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에 토대를 둔 문명보다 더 우월하다. 전자는 재생이 가능해 지속 가능한 반면 후자에게는 죽음의 기색만 남게 된다. (243)

참된 행복과 풍요는 성장’ ‘발전’ ‘물질’ ‘소유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의식을 바꿈으로서 얻을 수 있다고 슈마허는 피력했다.

 

슈마허는 1960년대에, 스콧베터라는 공동 소유권 기업의 경영에 직접 참여한 바 있다. 자발적으로 설립된 직원위원회를 통해 모든 종업원들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경영에 참여했던 영국 최초의 공동 소유권 회사다.

슈마허는 스콧베터의 경험을 통해,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기업의 규모와 임금의 격차, 수익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제한을 둘 필요가 있으며 이런 한계를 구성원들이 스스로 결정할 때 지역에 토대를 둔 기업의 이윤이 다시금 지역 안에서 재순환 된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입증하였다. 소유 의식의 변화에 관한 이 실험은 지금까지 우리가 맹종해온 서구적 형이상학들, 가령 규모, 성장, , 소유에 대한 거대주의의 미신에서 벗어나 작은 것들, 다시 말해 약자들의 관점에서 기업을 경영하기 시작할 때 실제로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경영 활동을 통해 참다운 풍요를 누릴 수 있는지 지혜를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245)

 

지혜를 구하는 노동과 교육.

 

슈마허는 결국 종교적 각성을 통한 깨달음만이 이 지상을 다시 신의 아름다운 공예품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된 슈마허는 말년에 이르러 가장 몰두한 것은 노동교육이었다. 산업사회에서 노동은 돈을 버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한다. 교육 역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직관력, 감수성, 상상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양적인 지식 축적을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를 지혜로운 삶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슈마허는 노동과 교육이 지닌 본래의 참된 의미, 즉 노동과 교육의 영성적 의미를 되살리지 않는 한 대안 에너지개발과 같은 기술적 노력만으로 산업주의의 파국적 진로를 되살리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좋은 노동을 통해서 누구나 지혜를 얻을 수 있는데 그 지혜란 바로 인간의 한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며, 한계는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 슈마허는 피력했다. (253)

지금과 같은 서구의 풍요가 정상이 아니며 이 비정상적인 상태가 곧 막바지에 이를 것이라고 슈마허는 예언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물질적 풍요가 인간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정신을 마비시키는 비인간적인 노예노동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 없는 노동으로 인간은 돈벌이의 수단이 되었고 악의에 찬 경쟁으로 인간 정신은 굴종과 복종에 순응하게 되었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새들처럼 사람에게도 생계를 넘어선 다른 차원의 삶이 있어야한다. 먹잇감만 찾아다니는 삶이 아니라 노래도 부르고 날개 짓도 하여 대기에 온기를 불어 넣고, 그래서 다른 존재에게도 활력과 기쁨을 주는 그런 삶을 가꾸어가는 것이, 말하자면 창조주가 보시기에 좋은 예술품인 것이다. (255)

슈마허가 보기에 진정한 교육이란 좋은 노동과 나쁜 노동을 구별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올바른 교육은 노동의 본질이 생명의 기쁨이자 에너지이며 우리가 전인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지혜임을 가르쳐준다. 탐욕이나 시기심 같은 자아 중심적 욕구에서 해방되어 더 높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자아를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힘껏 돕게 한다. 산업교육은 먼저 남이 있어야 나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일자리 창출을 염두에 둔 중국인들의 자급자족주의 정신과 버마인들의 불교경제다. 그리고 슈마허가 고안하고 실천해본 중간기술은 물론이고, 종업원 지주제 같은 공동소유권 회사도 지역 특성에 맞게 소규모 단위로 실험해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