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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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책을 잠시 덮고 급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깊이 생각할 일이나 고민거리가 생기면 손톱을 물어 뜯는 습성이 있어 글쓰기를 끝내면 손끝이 아린 기억이 있어서...... 투명한 매니큐어로 손톱을 보호한 후, 진지한 눈길로 잔혹한 아우슈비츠와 끔찍한 피폭의 현장 히로시마로 들어가 보았다. 독일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유대인 집단학살현장이었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와 연합군에 의한 원자폭탄에 녹아 내렸던 일본의 히로시마! 저자 이안 부루마는 독일과 일본의 많은 역사학자, 증인, 교육자 등을 직접 만나 심도 깊게 다룬 대화의 자료들과, 영화 연극 출판물들 속에 비친 각 나라의 문화와 정서를 분석한 정체성을 통해, 종전 후 두 나라 정부와 국민들의 대응점이 확연히 다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호전성, 인종적 순수성, 희생정신, 기율 등에서 공통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두 민족! 그러나 전쟁을 되돌아 보는 양 국민의 집단적 기억 차이의 발로는 문화적인 것인지, 정치적인 것인지? 아니면 루스 베네딕트가 구분한 것처럼 기독교적인 '죄의 문화'와 아시아적인 '수치의 문화'였나를 고심하면서...... 네덜란드 태생인 저자가 유년 시절 읽었던 만화 속 악당들은 '독일인'이었다. 나치가 아닌 말 그대로 독일인. 1940년에서 1945년 독일인의 네덜란드 점령에서 비롯된 적대감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 사안이었다. 두 나라는 같은 북방 게르만족으로 문화와 언어, 식사나 음주 습관의 유사점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런던, 파리, 심지어는 뉴욕을 베를린보다 더 가까이 느끼며 성장했다. 2차 세계 대전의 또 다른 적이었던 일본인은 상상력을 자극하기조차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반자이!"를 외치며 인간의 생명이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던 일본인 역시 만화의 단골 악당 역이었다.


걸프전이 시작된 지 두주째 되던 19911월 마지막 주, 이안 부루마는 서독의 수도 본에 도착했다. 이 무렵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쟁을 구경하는 입장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서독의 수도 본의 분위기는 달랐다. "석유를 위해 피를 흘릴 수는 없다.",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시는 전범이다." 등의 구호가 적힌 포스트가 고풍스런 저택의 창과 벽 그리고 시 중앙광장 베토벤 동상의 손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부루마는 본에 사는 한 이스라엘 사람을 소개 받았는데 그는 "독일인들의 심장을 검사해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대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아드레날린이 과잉 분비되는 현상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또 걸프전이 독일인들에게서 그렇게 경악을 불러 일으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며, 전 후 나이 든 세대는 거의 모두 친 유대주의자가 되었다고 했다. 60년대 후반부터 많은 독일의 젊은이들은 부모세대의 과거를 비판했다. 과거에 대해 침묵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증오했으며 그들의 친 유대주의도 경멸했고, 독일에서도 베트남에서도 이스라엘에서도 그들은 자기네 부모의 비겁함을 보상하려 했고 저항하려 했다. 걸프전 동안에 많은 독일인들의 심정을 잘 요약해 주는 독일어 단어가 '베트로펜betroffen'인데, 베트로펜하다는 것은 (죄책감, 수치감, 당혹감에) 말문이 막힘을 뜻하며 또 '과거를 극복할' 하나의 길, 즉 죄를 뉘우치고 고해함으로 사함을 받고 죄를 씻을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의미한다. 이 베트로펜한 모습은 베를린의 한 음대학생들의 반전 행사에서 부른 노래의 후렴구에 "우리는 베트로펜하고 깊이 충격 받았다" 라고도 나타나져 있었다. 또 자기 동족의 민감한 부분을 찌르는 법을 정확히 알고 도발에 능한 작가이며 에세이스트인 엔첸베르거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를 쓰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잃었는가?

내 부모들이 아무 생각 없이 나를 낳은

이 나라에서.

이곳에 태어났지만 마음은 불편한

나는 여기에 부재한다.

말쑥한, 만족한 무덤 속에

안락한 비참 속에 머물며.

 

엔첸스베르거 세대는 자기 만족적인 열의로 경제적 번영을 향해 달려가는 서독사람을 불신했고, 통일된 독일이 아우슈비츠를 산출한다는 이유로 통일을 반대했으며 문명화되지 못한 동독사람들과 어떤 연관도 맺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편, 도쿄에서 보는 걸프전은 먼 세상의 일로 여겨졌다. 전쟁이라는 생각 자체에서 일본은 독일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떤 현수막도 평화시위도 없었으며 베트로펜하이트(경악, 당황, 당혹)의 기미조차 없었다. 다만 언론계와 학계 전문가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구와 중동 사이의 문화적 또는 종교적 갈등의 산물로 해석할 뿐이었다. 독일인들이 걸프전을 거울삼아 자신들의 아우슈비츠를 상기하는 동안, 자신들의 전쟁 죄과와 히로시마를 기억한 일본인들은 몇 명이나 있었을까?

 

어느 따스한 봄날 이안 부루마는 독일인의 정체성을 찾아보기 위해 아우슈비츠 박물관과 비르케나우 학살수용소를 방문했다. 잘해야 40명쯤 들어갈만한 공간에 수백 명의 사람을 빽빽이 처넣고 학살한 비르케나우 목조 가건물 속의 삶을 상상해보려 했지만 지식을 통한 고통과의 동질감을 느끼기엔 공기내음이 너무 맑았고 풀들이 너무 싱싱했으며 얇은 벽 사이에 끼어 있는 목재 간이 침대들은 너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서독의 한 작가가 1964년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 자료 수집을 위해 그 곳을 방문했을 때 한 여자 증인의 증언 속에 '기립감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높이 2m, 바닥면적 50cm 50cm, 환기구 5cm 8cm인 이 감방은 수감자가 선채로 굶주림과 공기부족으로 천천히 죽도록 고안된 것으로 희생자 중 몇 명은 자신의 손가락을 씹어 먹기도 했고, 죽은 후 시체는 건초용 쇠스랑으로 끌어냈다고 했다.


아우슈비츠는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독일의 과거이며 민족정신에 찍힌 검은 얼룩이고 독일의 문제이자 독일의 일부였다. 이에 대한 기록물이나 역사적 전시회 또는 증인의 보고문, 이런 것들은 적어도 서독에서는 넘쳐났지만 이 홀로코스트를 직접 다룬 소설이나 연극, 영화는 거의 전무 하다시피 했다. 독일 작가들이 아우슈비츠를 정면으로 다루기를 꺼리고 성역화 된 장소나 박물관 또는 교실 밖에서 유대인 학살 문제를 다루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있을 때, 이 금기는 할리우드의 인기 연속극에 의해 깨졌다. 능숙하게 만들어진 이 대중물 <홀로코스트>는 기존의 어떤 것보다도 깊이 독일인의 상상력을 파고 들어, 1979년 첫 방영 당시 서독 성인 인구의 약 절반인 2천만 시청자가 보았고, 그 중 58%는 재방영되기를 바랐다. "한 민족에게 있어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것을 '정체성'의 눈으로 본다는 것으로 '우리가 내면화'한 것은 아우슈비츠"라고 독일 역사가인 크리스티안 마이어가 결론지었다.


베를린에는 짧고 좁은 연결 도로를 두고 일본과 이탈리아의 대사관이 있는데 오늘 날에는 이 거리를 히로시마 슈트라세라고 부른다. 이탈리아 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이 명칭은 일본 국의 발의로 이뤄진 게 아니라 베를린 시 정부의 평화주의를 과시하기 위해 선택된 이름이었다.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히로시마는 태평양 전쟁 최고의 상징이며 일본 민족이 모든 고난을 집약한 단어로써 절대악의 상징으로 아우슈비츠와 자주 비교된다. 194586일의 원폭투하는 20세기에 자행된 최악의 죄악이었다고 히로시마 대학교수인 사이카 다다요시는 말하며 원폭 위령탑에 다음과 같은 비명을 지었다.


"여기 모든 영령들을 평화로이 쉬게 하라. 우리는 악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니."

여기서 말하는 표현의 애매성은 의도적인 것으로 '우리'가 오직 전쟁 중의 일본정부만을 지시함을 '오해' 받지 않으려고 80년대 영어와 일본어로 된 안내 판이 새로이 배치되었다. 죽은 이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신사, 기념비, , , 분수, 사원으로 가득 찬 평화공원은 그야말로 하나의 순례지이다. 상점에서 파는 기념물마다 빠짐없이 평화의 기도가 적혀있고 오늘날 '원폭 돔'이라고 불리는 당시 히로시마의 다 타버린 골조 사진이 인쇄되어있다. 그 진짜 잔해는 공원 한쪽 끝을 지나는 강 맞은 편에서, 자행된 악을 영원히 상기시키기 위해 보존되어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이곳이 일본인 희생자만을 위한 추모 장소하는 사실이다. 공원 바깥에는 원폭에 희생된 한국인들을 위해 남한 거류민단에서 건립한 기념비가 한 구석을 자리잡고 있는데, 강제 노역자로 끌려간 2만 한국인들 중 단 한명의 이름도 적혀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한 장례식도 위령제도 치러진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히로시마는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외친다. 마치 전쟁은 없었고 원폭투하만 있었던 것처럼.

 

19455월 히틀러와 그를 추종하던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자살하고 난 후, 비로소 남아있는 나치 지도부에 대한 재판이 뉘른베르크 최고재판소에서 열렸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서 임명된 판검사로 구성되었고 방대한 증거 서류는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역사 세미나를 이루었다. 만국에 독일의 전쟁혐의가 정당화될 수 없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국민에게 그런 행위는 엄벌을 받아야 함을 보여주어야 하는, 일종의 역사수업인 동시에 상징적 처벌을 의도하였다. 말하자면 정당하고 합법적인 재판의 의식을 위장한 도덕적 교훈극인 셈이었다. 이 후 계속해서 나치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고, 1992년 초 슈투가르트에 있는 주()재판소에서 여든 살의 나이에 종신형을 선고 받은 요제트 슈밤베르거에 대한 재판이 마지막이 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소 건물은 둔중하다 못해 난공불락처럼 보여 마치 역사적 환상을 위한 세트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 도쿄에는 이를 비견할 만한 재판소 건물은 없다. 일본, 동남아 그리고 다른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연합국 주도하에 1946년부터 2년 동안 2천회 이상의 전범재판이 열렸던 건물은 종전까지 사령부로 사용했고, 그 이 전에는 사관학교 건물이었다. 이 곳에서의 재판 중 피고에게 유리한 증거자료가 공개되지 않는 일이 종종 있는가 하면, 검찰 측 증인에게 우선권이 부여되는 우스꽝스런 의식을 연출했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이 얼마나 책략적이고 표리부동하며 권력에 눈이 멀었는지에 대해 막 알려지기 시작한 단계였기 때문이다. 정치학자인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쟁 전 자국의 정부를 '무책임의 체제'라고 불렀다. 그는 정치가를 미코시(일본에서 축제나 제사 때 신의 옥체를 안치해서 짊어지는 가마. 일본지배 정신의 상징으로 여김), 공무원, 그리고 무법자로 구분했다. 미코시는 권위를, 공무원은 권력을, 무법자는 폭력을 대표하는데 이중 미코시의 지위가 가장 높다. 도쿄 전범 재판에서 기소된 A급 범죄자들이 공무원과 미코시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최고 미코시인 히로히토 천황을 보호하기 위한 미국과의 뒷거래, 즉 맥아더는 천황의 상징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천황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것을 정화시켜야 했다. 덕분에 천황은 기소를 면했을 뿐 아니라 증인 소환조차 할 수 없었고 재판에서 완전히 제외시킨다는 뒷거래가 이루어졌다. 형식상 천황에게 모든 책임이 있음에도 그에게 아무런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일본인 모두의 무죄를 인정하는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안 부루마는 또 전후 교육현장을 방문하고 교과서를 직접 검토해 보았는데, 동독의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역사 기술은 두 개의 짧은 구절로 실려 있었다. 전쟁 자체에 대한 사진이나 잔학행위, 인종말살을 싣기보다 소련해방군과 공산주의 저항운동가의 용맹성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 채...... 동독의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저지른 범죄를 속죄하거나 거기에 대해 숙고하도록 요구 받지 않았으며, 아우슈비츠가 그들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선 안되며, 영웅과 동일시하도록 배우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서독의 교과서에는 저항 운동 영웅들의 사진은 거의 없고, 대신 홀로코스트 사진이 많았다. 거의 모든 교과서에 나치의 기록들이 상세히 인용되어져 있었으므로, 그들은 동독을 같은 동족과 같은 역사의 일부로 느끼기보다 오히려 제3국을 역사의 일부로 여겼다. 또 동독이 중앙정부가 지정한 학자들이 집필한 교과서를 쓰는 것과 달리 주 마다 다른 교과서를 취하며, 1년에 60시간 나치 역사에 대한 배움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올바른'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합헌적 관점에 따라 학생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자극을 받고 있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고 전직 고교교사인 이에나가 사부로가 1952년 집필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많은 학교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4년 후부터 그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일본 문부성은 이에나가의 텍스트가 너무 부정적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는 특정한 부분들, 특히 난징학살과 일본군에 의한 강간. 그리고 만주 731부대에서의 생체실험에 대한 부분을 삭제하라는 요구에 굴욕감을 느껴 1965년 정부에 소송을 제기했고, 일흔아홉 살이 된 1992년에도 여전히 도쿄의 대법원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었다. 부루마가 1984년에 출판된 일본 전역에서 사용되었던 교과서 한 권을 보았더니, 거기에는 상이군인이나 일본군인 잔학행위에 대한 사진은 없었고 대신 히로시마의 폐허 사진과 진주만에서 격침 당한 전함 아리조나의 사진만 있었다. 게다가 '침략'이란 용어대신 '군사적 진출'이란 말로 미화시켜 표현했고 중국, 한국, 동남아 그리고 일부 유럽 여성들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의 공적 개입이 없던 사적인 사업이었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다.

 

과거로부터 미스테리를 벗기는 것. 고정된 법칙에 꿰어 맞추려 하지 않으면서 사건들을 어느 정도 일관적인 연쇄로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을 비판적으로 설명하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가의 작업이다. 이것은 어려운 작업이며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고 죄와 수치의 문제가 아직 살아 있을 때는 해내기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1933년과 1945년 사이에 독일과 독일이 점령한 나라들에서 일어난 일은 '보통'역사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1933~1945년 사이를 '보통'역사로, 즉 하나의 교훈 극이 아닌 구조적정치적문화적으로 그 이전과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과 연결된 하나의 시기로 다루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독일에서는 이것을 역사화라고 부른다. 이러한 역사화가 내포한 역설은 보다 객관적인 과거 관을 목표로 한 과정이 진행될수록 상이한 주관적인 견해들을 가져온다. '보통'역사는 해석의 다양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역사화'의 또 다른 역설은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고 역사화의 목표는 과거에 대해 냉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죄책감의 짐을 벗고 용서받고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에 반해 일본인들은 침묵을 지키며 무엇보다 남들이 침묵을 지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신의 관점에서의 죄가 아니라 공개적인 수치, 난처함, '체면' 때문이다. 진주만 공격 50주년 기념일에 호놀룰루 시장은 일본 정부가 지난 전쟁에 대해서 사과한다면 일본정부인사를 기념식에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그 때야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거부하며 '전 세계가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논평했다. 그러니 미국도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책임회피는 "남들도 다 그렇게 했는데 왜 나만 갖고 그래요" 하고 소리지르는 어린아이의 반항과 유사한 점이 많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대해 달라는 이러한 요구가 특히 기이하게 들리는 것은, 일본인들이 다른 때는 언제나 자신들이 문화적, 인류적, 정치적, 역사적으로 독특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이 열두 살짜리 소년의 나라라고 했다. 하지만 이안 부루마는 일본이 아직도 열두 살이길 바라는 성인들의 나라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전쟁과 평화 문제에 대한 책임감 없이는 과거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다. 보통국가가 되려면 먼저 정치적 변화가 있어야 함을. 개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그들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이 독일의 반만큼이라도 베트로펜해지길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