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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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늘 앞서 가는데 일상은 완고하게 발목을 잡고 늘어져 있다. 무엇을 위해 날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숨차게 뛰어 일터로 가고 퇴근하면 편안한 대화 몇 마디 나눌 새 없이 또 집안일을 반복해야 하는가. 도돌이표처럼 시간이 가고 날이 간다. 그렇게 가는 것이 삶이라니. 끊임없는 반복으로 우리를 제자리에 수렴시키면서도 이 일상은 조만간 어딘가에 나를 던져놓을 것이다. 그래서 불안해진다. 너무나 익숙한 이 길을 스스로 걸어 다닌다고 생각하지만 그 익숙함에 몸이 실려 끌려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저 발걸음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리듬을 가끔씩이라도 깨주는 수상한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차라리 구원이라도 받은 양 반갑기까지 하다. 이상한 형국이 아닌가.


시인 뮈세는 이런 일상의 면모에 대해 일찍부터 알아채고 거기에 뭔가를 기대하기는커녕 끝까지 경계의 눈초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생계를 위해 한 때 도서관 사서 일, 신문 연재소설 쓰기 등 방편이 될 만한 일들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일들은 그에게 그 일상의 민낯을 아주 제대로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그가 쓴 소설 <베네치아>를 보면 그는 두 가지 정열’-도박과 연애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거기에는 이 두 가지와 더불어 일상도 자세히 설명해놓았는데 그 일상은 항상 이들을 간섭한다. 그러면서도 일상은 자신의 감각들을 집중시키는 일에 익숙해진 도박꾼이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느리고 너무 연속적이다. 하지만 그런 도박꾼 정도라면 모를까, 보통 일상은 그저 부사수처럼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 같지만 그 은근한 위력이 의외로 대단해서 자칫하면 빠져나올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런 이치를 낱낱이 알고 있는 주인공은 그것을 늘 물리쳐버린다. 일상이 생겨나는 일체의 것 - 사회적 역할이나 예술적 성취에 목적을 두고 행해지는 일상화된 모든 행위를 아예 거부해버리는 것이다. 그는 뮈세의 분신이다. 뮈세 자신도 도박꾼이 가진 돈을 전부 털어 승부를 보듯 일생동안 오직 사랑에 몰두했고 그 열렬한 사랑과 시 쓰기로 자기만의 일상을 삼았다.


뮈세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일상과 욕구를 화해시켜 보다 안락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겠다. 예를 들면 영화 <사브리나>에서 사브리나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다. 그는 회장님의 운전기사로 평생 일을 해왔는데 그가 그 일을 선택했던 이유는 단 하나. 회장님이 일을 보고 이동하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책을 실컷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예 회장 저택의 구석진 방 하나에서 살았다. 그 방은 항상 깨끗하고 따뜻했으며 벽은 책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바로 옆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책과 함께 딸 사브리나를 멋진 숙녀로 키우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자기 소유의 집과 차가 없어도, 게다가 부인도 없지만 그에게 일상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유하지 않고도 이렇게 일상을 영위해날 수 있다면야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이런 소박한 생활은 욕망이 그리 크지 않은, 혹은 더 큰 욕망을 가지고서 성취하기까지의 고통을 감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희망 사항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소유에 대한 의식에 있다. 그는 회장님의 대저택을 보며 욕구불만을 품는 게 아니라 그 방을 평생 빌려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 수많은 책으로부터 얻은 지혜 덕분이었으리라.


어쩌면 사브리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그런 꿈을 이룰만한 적당한 기회를 제대로 얻은 운 좋은 사람 축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크던 작던 꿈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꿈은 언제나 멀리 있다. 우선 먹고 살기 바빠서’, 그 꿈에 당장 달려들지 못한다. 그 사이 그 꿈이 좀 더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붙잡기가 쉽지 않다. 기회를 찾던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향한 욕망을 자꾸만 덜어내고 또 덜어내기 시작한다. 시간이 갈수록 일상의 영역은 커져만 가고 꿈은 이제 어딘가로 실종되어 버리고 만다. 이제 빈 껍질 같은 일상만 남아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서 쓰디쓴 허탈감이나 맛볼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이제 와서는 그게 최선이겠다 싶은 방법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주말에 차를 몰고 나섰을 때 서울은 가는 길마다, 보이는 길마다 차로 꽉 차서 마치 천천히 반짝이며 흐르는 물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나와 내 차가 그저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한 처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증발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서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지만 몸부림을 한번 잘못 쳤다가는 도리어 더 깊은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럴 때 영화 <라라랜드>의 감독은 상상의 돗자리를 드넓게 펼친다, 그리고 영화 도입부에서 ‘4분간의 마술을 보여준다. 그 꽉 막힌 길에서의 답답함을 정말로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막힌 고가도로 위에서 제각각 라디오를 들으며 빵빵거리던 운전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차 문을 열고 나와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윽고 운전자들은 하나 둘씩, 다들 합류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멈추어 있는 시간을 즐거움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영화는 이후 내내, 누구든지 자신의 꿈과 서로의 사랑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상황에서 느끼게 될 법한 흔한 감정들을 잘 챙겨 환상적인 묘사로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그것을 유일한 것으로 아름답게 기억하게 한다. 이렇게 환상적으로 시각화된 장면들은, 이야기의 밋밋한 흐름에 균열을 주고 그 틈으로 감정의 세계를 활짝 펼쳐내면서, 보는 이들을 몰입시키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이미 이야기를 평범하지 않게 시작하는 것으로 성공을 예비해놓았다. 어떤 이야기든, 새로울 것 없는 그저 흔해 보이는 이야기라 해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는 유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주인공들은 감독을 정말 잘 만났다. 그들의 일상은 날마다 새로운 하루로 이어지니까. 그게 다 감독의 구급차 같은 상상 덕분이다.


길 위를 오가는 사람들 중에 까다로운 표정의 뮈세가 눈에 띄지만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가느라 고개조차 돌려보려 하지 않는다. 사브리나네 아버지는 천천히 미소를 띤 채 몇 몇 사람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그 중 누군가에게는 말을 걸기도 하더니 방금 무언가 흥미로운 일을 찾아낸 것 같다. 저만치 앞서 가던 <라라랜드> 사람들은 거리를 가득 채운 이 무표정한 사람들을 흔들어놓는 것에 재미가 붙어서 갑자기 돌아와 한바탕 텝댄스를 출 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일상의 간계에 속아 넘어가기 싫다고 손사래를 치고, 또 누군가는 밀고 들어오는 그 모습이 흥미로워 빈 가슴을 내주는가 하면 영리한 누구는 답답한 일상을 가지고 놀이를 한다. ? 나는 내 것이 될 한순간을 붙잡기 위해 온종일 애먼 눈만 부릅뜨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