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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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글/황민재)

2017.12.01 11:06

관리자 조회 수:47

고향이 그립다. 가지 못하는 고향이 더욱 그립니다. 수많은 실향민들의 고향 그리워하는 심정을 나는 알 것 같다. 나의 어렸을 때, 그러니까 1941년 국민학교 일학년 일 학기까지 자랐던 그리운 고향이 있다. 그곳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천일염전이 있는 증도라는 섬이다. 그 옛날 그 섬에서 목포에 나오려면 나룻배로 중간에 있는 나의 큰아버지가 사는 섬으로 와서 다시 그 섬의 맨 끝까지 종주하여 목포에 가는 여객선을 탈 수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화물은 풍선(돛단배)을 이용했다.


나의 아버지는 앞으로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는 그렇게 교통이 좋지 않은 곳에서는 어렵다는 생각에서 그 때로는 상당히 먼 곳인 장성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그곳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광주에서 자랐다. 여름방학 때 두 번 큰아버지가 사시는 그 섬에 갔었다. 그러나 그 옆 큰 섬인 내가 태어난 고향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육이오 전쟁으로 인하여 부모도 돌아가시고 재산도 모두 없어진 상태에서 195310월경에 포로수용소를 나와 큰아버지 집으로 찾아갔다.


그곳은 몇 년 전 방학 때 왔던 그 때와는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같이 놀며 밤이면 남의 목화밭에서 일부러 심어놓은 참외서리도 같이 했던 또래의 사촌과 친척들이 나를 만나면 겨우 알은체만 할 뿐 가까이하지 않았고,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가도 자기들끼리만 가고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무서운 현실에 나는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다음해 봄 나는 큰집을 나와 동네와 떨어진 야산에 염전을 만드는 기술자들이 있는 막사로 찾아가서 그들의 밥을 해주는 일을 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목포에서 반찬을 가져온 빈 반찬통을 다시 목포로 보내기 위해서 여객선이 닿는 탑선포라는 곳으로 지게에 빈 반찬통을 지고 가던 중 산모퉁이에 잠깐 지게를 받혀놓고 쉬고 있었다. 그 때 저만큼에서 사람들 말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더니 외사촌 형도 같이 오고 있었다. 조금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얼른 돌아서서 지게를 붙들고 고개를 지게 바싹대고 있었다. 다 지나가고 조금 멀리 사라진 후에야 천천히 가서 그 사람들은 이미 나룻배를 이용하여 여객선에 타고 나는 빈 반찬통을 나룻배에 얹어주고 돌아왔다.


그 염전이 다 만들어지고 기술자들도 떠나고 내가 밥을 해주는 일도 끝났다. 나는 다시 숙식에 제공되는 그 섬 끝에 있는 염전으로 가서 소금을 만드는 염부가 되었다. 그 염전에서는 내가 태어난 고향의 큰 섬이 바로 건너다보였다. 바로 건너다보이는 곳은 구분개라는 곳으로 박씨 성을 가진 네다섯 가구만 작촌해서 사는 곳으로 그곳에서 작은 고개 하나만 넘으면 내가 태어난 증동리라는 곳으로 삼백호가 넘는 넓은 곳이었다.


지금은 분면이 되어 증도면 면소재지가 되었다. 그 빤히 건너다 보이는 구분개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내 큰 형수가 태어난 곳으로 내가 이사 오기 전 해에 아버지를 따라 약혼 중이었던 큰 형수에게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 형수가 무척이나 나를 귀여워해주시던 기억이 어제련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은 성은 기억나지 않는 성준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장난감이 없던 그 옛날 우리 집 뒤 골방에서 고구마를 깎아 인형을 만들며 놀았고 늦은 여름이면 왕잠자리 잡기를 하며 놀던 기억도 새롭다.


외갓집의 큰 마당 넓은 사랑채도 그리고 우리 집에 몇 번 왔던 외사촌 형들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그 그리움을 접어야 했다. 내 처지를 다 알고 있을 그들의 싸늘한 눈빛들을 상상하니 모든 기억과 그리움이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해 봄 그리운 고향도 외사촌 형들도 끝내 보지 못하고 서울에 왔다. 아는 사람도 없고 염전에서 조금 저축한 돈으로는 우선 방을 구하는 데 써버렸다. 그래서 막노동부터 노점장사까지 험한 일을 하면서 드디어 삼 년 후에는 종로 낙원시장 입구에 점포도 마련했다. 그리고 그해 큰아버지가 정해준 혼처에 가서 결혼도 했다. 소문은 지나치게 과장되어서 성공했다고 야단들이었다. 물론 이웃 섬이 내 고향에도 알려졌다.


1970년 강원도에 세웠던 주유소가 정착이 되어 동생에게 맡기고 서울에 다시 와서 전문 건설업체를 세웠다. 큰아버지가 사시는 그 섬의 친척들이 일자리를 찾아 우리 회사에 많이 와서 과장된 소문은 더욱 많이 커졌다. 나는 더 크게 성공해서 고향에 꼭 가고 싶었다. 팔십년 대에는 막내아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나 선망하는 서울대학에 들어가니 고향에도 그 소문이 또 퍼졌다. 나의 아버지가 독립만세 운동으로 이 년간 옥살이를 끝내고 처가 동네로 가서 사설학원을 차렸었다. 그래서 고향에서는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며 더욱 칭찬이 자자했다. 나는 아들을 앞세우고 고향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무렵 내 사업체가 유동성 부족으로 부도가 나 버렸고 망했다는 소문도 빠르게 퍼졌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고향에는 갈 수가 없었다.


지난해에는 모 방송국 광주지국에 있는 아들의 친구가 증도의 리조트를 예약해 줄 테니 부모님께 다녀오시라 한다며 아들이 내 의향을 물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이렇게는 가고 싶지 않았다. 금의환향은 못하더라도 내가 꿈꾸고 있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이루어놓고 당당하게 고향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어리석고 실현불가능하다고 비웃겠지만 나만의 꿈을 매일 꾸고 있다. 그 꿈을 이루는 날 고향에 가련다. 이 가을에도 먼 남쪽 하늘을 넋 잃고 바라보며 가슴 뛰는 꿈속으로 젖어든다. 그리고 망향의 서글픔을 오늘도 그 꿈을 꾸며 삭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