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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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 하는가?>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다. 그는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 유대 캠페인이 절정기일 때 교수직을 잃고 국적도 박탈당한다. 1971 리즈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영국에 정착한다. 그는 1989년 발표한 <근대성과 홀로코스트>라는 책을 펴낸 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글쓴이 바우만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 하는가?>의 들어가는 말에서 유엔대학 세계개발경제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를 인용했다. “2000년 현제 전 세계 성인 최 상위 부자 1퍼센트가 전 세계 자산의 4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상위 10퍼센트의 부자가 전 세계 부의 85퍼센트를 차지하는 반면에 하위 50퍼센트는 전 세계 부의 겨우 1퍼센트만 차지하고 있다. 이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는 이 발표를 인용하면서 빈부 격차의 심각성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전 세계가 필사적으로 경제성장 근본주의를 밀고나가고 있는 데도 빈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부자와 빈자의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지고 있다. 이것은 경제 발전에서 걷은 결실이 대부분 이미 소득을 올리고 있는 상대적 소수에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이 책의 첫머리에 실린 마태복음의 한 구절이 증언하고 있듯이 불평등의 가속적인 확대재생산 성향은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불평등과 그 원인과 결과는 영속적인 문제로 매우 새롭고 충격적인 출발점들로 인해 다시금 사람들의 열띤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13)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복음 1312)

 

우리는 정확히 얼마나 불평등 한가?’ 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날이 갈수록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는 점에 글쓴이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 세계 인구 중에서 최 상위 1퍼센트의 부자들의 부의 총합은 하위 5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부의 총합보다 거의 2000배나 된다.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퍼센트가 생산 재화의 90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에 가난한 20퍼센트는 불과 1퍼센트만을 소비하고 있다. 또한 전 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의 총합이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의 총합과 같은 것으로 추정했다. (19)

 

모든 연구들이 동의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전 세계 모든 곳에서 불평등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는 것,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는 것 같다. (영구기관이란 외부의 영향이 없이도 자체의 힘만으로 작동한다는 가상의 영구기관을 뜻함. (21-22)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미국이, ‘부자들은 담장공동체에 살면서 자녀들은 값비싼 사립학교에 보내고 최고의 의료 혜택을 받는 반면에 나머지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기껏해야 보통 수준의 교육과 배급제와 다름없는 의료서비스를 받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라가가 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것은 두 세계로 구성된 그림이다. 두 세계 사이에는 사실상 접점이 거의 없고 소통도 거의 끊어져 있다. (24~25)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는 대니얼 돌링의 주장을 인용했다.

대니얼 돌링은 불평등의 현상과 원인에 대한 연구에서 부유한 국가들 내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부정의의 교의들에 대한 믿음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므로, 만일 우리가 사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구조에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여기서 부정의의 교의는 큰 소리로 선언되는 확신들을 뒷받침하고 타당한것처럼 보이게 하는 암묵적(암시적) 전제들로서, 지금까지 숙고되거나 검토된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믿음들을 가지고 생각한다. (35)

 

우리는 소수의 능력을 보살피고 다듬고 뒷받침해주고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다수의 행복에 이르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도록 교육과 훈련을 받아왔다. 능력이란 원래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특권들의 위계는 피라미드 모양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줄기차게 들어왔다. 이것이 저항 없이 불평등을 감수하게 만든다.

(87~88)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대에 노예농장을 소유한 가족들은 노예에 대한 소유권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또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자연의 섭리로 여겨진 적이 있듯이 많은 이들에게 우리 시대의 너무나 커다란 부정의는 정상적인 경관의 일부일 뿐이다. (89)

 

개인의 재능과 능력들의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은 수백 년 동안 사회적 불평등이 무리 없이 수용되는 데 기여한 가장 강력한 요소 중의 하나다. 이제 사회적 불평등은 스스로 영속화 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제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94)

 

자본주이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구조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인생이란 게임에서 던질 수밖에 없는 주사위는 더 많이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게 정해져 있다.

 

새빨간 거짓말 그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소제목에서는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존 쿳시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했다.

우리는 원래부터 서로 경쟁하는 경제 주체들로 갈라지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말은 궤변이다. 경쟁적 경제는 우리가 그것을 만들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다. 경쟁은 전쟁의 순화된 대체물이다. 전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면 전쟁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선택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경쟁을 원한다면 우리는 경쟁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경쟁 대신에 우호적인 협력을 하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45~46)

 

21세기 초의 우리의 세계는 인간적 연대의 우호 협력, 평화 공존에도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사방에 탐욕, 부패, 경쟁, 이기심이 편제하는 현실, 그렇기 때문에 상호 의심과 끊임없는 경계를 조언하고 찬양하는 현실, 사람은 혼자서 이러한 현실을 바꿀 수도 없고 이러한 현실이 없어지기를 바랄 수도 없으며 그러한 현실을 얼버무리거나 무시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무의식적이든 우연이든 간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세계를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외에 거의 아무런 대안도 없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는 흔히 현실(우리의 도움으로 날마다 재생산되는 인위적이고 주입되고 상상된 현실)을 인간의 힘으로는 맞서거나 개혁할 수 없는 당연한 세상 이치로 오해한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사람들은 이런 세상이 우리가 살아 가야하만 하는 세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옳은 결론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대안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결론을 짓는다. 이것은 잘못된 결론이다. (47)

 

사람들은 경제성장만이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경제성장이란 말은 정치학의 언어로도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선거운동 때마다(선거철이 아닐지라도 필요할 때) 정치가들의 연설이나 홍보 담당자들의 브리핑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그런데 경제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선구자들은 경제성장을 축복이 아니라 유감스러운 골칫거리로 생각했다. (52)

 

오백 년 전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가 말했듯이 온갖 종류의 사회적 불평등은 사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눈 데서 비롯된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원하지만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격렬한 분노를 일으키는 대상들이 많고 다양하다. 그것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고, 그것을 갖고 싶은 충동 또한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갖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분노, 굴욕, 앙심, 원한과 더불어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파괴의 충동까지 커지고 있다. 상점을 약탈하는 행위와 상점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둘 다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 것으로 동일한 갈망을 충족시킨다. (76~77)

 

못가진 자들의 최신 유행이라고 할 수 있는 자격 미달소비자들에게 쇼핑하지 못한다는 것은 충족되지 못한 삶을 나타내는 불쾌하고 역겨운 흔적이며 보잘 것 없고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표지이다. 단순히 쾌락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적 존엄 부재의 표지이다. 사실상 삶의 의미부재의 표지이고 결국은 인간성의 부재 그리고 자기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그 밖의 근거 부재의 표지이다. (78)

 

여기서 남들보다 한발 앞서기를 생각하게 된다. 즉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서 옆집 사람이나 직장 동료보다 한발 앞서 더 많은 득점을 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기는 불평등을 전제한다. (79)

 

그런데 남들보다 한발 앞서기는 생존을 건 싸움이다. 1퍼센트만 성공하고 나머지 99퍼센트가 실패하는 모델 속에서 공생고락의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한한 경제성장이라는 목적으로 귀결되는 부의 추구의 즐거움, 시장이 공급하는 소비재들의 향유, ‘남들보다 한발 앞서기등을 대신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없을까?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고민하면서 찾아야하는 길인 것 같다.

 

늘어나는 소비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수없이 쏟아지는 메시지들이 행복에 이르는 길은 쇼핑이다라고 암시를 주고 있다. 메시지들은 소비의 능력이 있건 없건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메시지는 사실은 진짜 소비자들(물론 이들에게는 등급이 존재한다)과 실패한 소비자들의 범주로 나눈다. 진짜 소비자는 필요한 자격을 갖춘 제몫을 할 수 있는 소비자들이다. 반면에 실패한 소비자는 무엇보다도 충분한 자원의 결여 때문에 메시지 기준에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수치스럽고 저급하고 품위와 자격을 실추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경쟁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경쟁이 초래한 사회적 불평등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공공연히 비난 받으며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72~73)

그런데도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는 없고, 불평등의 찬가, 현실 긍정의 찬가가 유행한다. 그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불평등을 옹호하고 불평등의 외침을 비웃는다.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왜 불평등에 동의 하는가.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바우만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말과 행동의 사이의 간극이란 글에서는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에 대해 언급한다.

탐욕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다. 온통 성장과 소비, 경쟁과 자기 이익에만 매달려있는 탈규제 되고 개인주의화된 세계에서 삶의 기술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들은 바로 이 점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들에게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대분의 사람들이 평등, 상호존중, 연대, 우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적인 행동이라든가 실질적인 삶의 전략을 살펴보면, 그들이 스스로 제시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들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상과 현실, 말과 행위 간의 간극이 얼마나 넓은지를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110)

 

이미 오래 전부터 공생공략의 모델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그 모델은 대체로 공적 논의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변두리에서 머물러 있었다. 일찍이 브리야 사바랭은 1825년에 발표한 <미식 예찬>에서 식도락’ ‘함께 모여 식사하는 일의 즐거움, ‘식탁 주위에 둘러 앉아 웃고 떠들기, 함께 모여 음식을 먹고 농담하고 떠들고 노는 즐거움 등은 사회에서 극히 중요한 유대에 속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문제는 공생공락의 즐거움이, 경제성장에서 얻어지는 부의 추구의 즐거움 시장이 공급하는 소비재들의 향유, ‘남들보다 한발 앞서기등을 대신해 행복한 삶의 비결로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82~83)

 

바우만은 그러한 시도들이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슬로푸드 운동을 예로 들고 있다. 패스트푸드의 대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지역의 전통적 요리법을 보존하고 지역 생태계에 고유한 농작물, 종자, 가축 사육 등을 권장한다.

이 운동은 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국제적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운동이 내걸고 있는 지속 가능한 음식과 지역 소기업 진흥이라는 목표는 농업 생산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정치적 의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 운동의 기본 목표와 이상은 남들보다 한발 앞서기와 무한 경쟁이 주는 잔인한 쾌락 대신에 지금까지 거의 잊혀져있던 공동 목적을 위한 공생공락, 친목, 협력의 기쁨을 되살리고 재발견하는 것이다.

슬로푸드 운동은 탈중앙화 되어 있다. 각 지부마다 지도자가 있어 맛보기 워크숍, 와인 시음회, 농부의 시장 같은 지역 행사들을 통해 지역의 장인, 농부, 맛을 알리는 일을 책임진다.

 

글쓴이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의 심각성과 불평등에 대해 줄기차게 토로했다. 이것은 세상에 너무 잘 알려진 일이라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의 대안으로 슬로푸드 운동을 언급한 것은 인상적이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기,’무한 경쟁에서 얻는 잔인한 쾌락 대신에 공동 목적을 위한 공생공락, 친목, 협력의 기쁨을 되살리고 재발견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마땅히 추구해야할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한국에서도 이런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역이나 직장에서 작은 단위로 각종 취미, 친목을 위한 동아리를 만들어 여기에 슬로푸드 운동을 접목시킨다면 사회 분위기가 한결 밝아지지 않을까 싶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그가 쓴 <피로사회>에서 말하기를, ‘성과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성과를 올리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 학대한다.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감성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피력한 바 있다. 감성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음악, 미술 등 예술 활동과 취미, 친목, 협력을 위한 동아리의 활성화, 여기에 슬로푸드 운동이 한데 어우러진다면 바람직한 한국적 모델이 출 현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요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마약, 섹스, 폭력 등 자극적이 것만 쫓는)를 순화시키는 데도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고찰하고 수정할 필요가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