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 home
  • 게시판
  • 오늘의 국어 이야기

친구(글/황민재)

2017.11.21 10:45

관리자 조회 수:88

친구란 무엇일까 일생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이런저런 친구가 있다. 어려서 같이 놀던 소꿉친구도 있고 학교에 다니면서 사귄 친구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된 친구도 있다. 동고동락하는 친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즐거움을 같이 하는 친구는 많지만 고통을 당할 때 같이 괴로워하고 위로해 주는 친구는 과연 얼마나 될까


옛글에는 익자삼우(益者三友)요 손자삼우(損者三友)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는 이익을 주는 친구도 있고 손해를 주는 친구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일학기를 마치고 그 당시로는 먼 타향으로 이사를 해서 어릴 때의 소꿉친구는 한 번도 만나지도 못하고 모두 잊어버렸다.


초등학교 때 친구와 중학교 때 친구 고향의 아는 사람들도 나의 특수한 지울 수 없었던 레드콤플렉스때문에 일부러 기피하고 있었다. 그 모든 친구들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두 사람 있었다. 그 한 사람은 지난번 글에 썼던 내가 가장 괴롭고 외롭고 곤궁할 때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며 생기를 불어 넣어준 고마운 친구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의형제를 제의했으며 그 후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형제의 인연을 이어간 익자삼우중의 한 친구였다. 지금도 명절이나 계절이 바뀔 때면 그가 하염없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또 한사람 나에게 큰마음의 상처를 준 친구가 있다. 내가 강원도에 세운 주유소가 정착이 되어 동생에게 운영을 맡기고 서울에 와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여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뜻하지 않게 의외의 장소에서 중학교의 동창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회상의 사장을 면담하기 위해 갔던 그 회상의 대기실에서 였다. 그 친구와 나는 헤어진 지 이십 오년이 지났으나 서로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친구가 너 살아 있었구나하고 환호성을 지르면 내손을 덥석 잡으며 눈물을 글썽이고 반가워했다. 특히 그 친구는 삼학년 때 광주역 부역장으로 있었던 그의 큰형 집에서 삼년 선배인 그의 작은형과 한방에서 셋이서 나는 하숙생으로 같이 지내며 그와는 한이 불속에서 잤고 선배인 그의 작은 형에게서 같이 기타도 배웠다. 얼마 후 그의 큰형이 광주 근처 극락강역 역장으로 전근하게 되어 나도 같이 따라가서 역관사에서 하숙하며 광주로 기차통학을 했다.


우리는 가을에 토요일이면 극락강 둑을 자주 거닐면서 노랑 하얀 보라색의 들국화의 진한 향기에 취해 들국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다음해에 육이오로 인해 그와 헤어지게 되었고 나는 큰 난리를 겪은 후 큰 아버지가 사시는 작은 섬에 가서 염전에서 일을 하면서 가을이면 잠깐 쉬는 사이에 들국화가 피어있는 언덕으로 가서 진한 향기를 맡으며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던 친구였다.


우리는 서둘러 서로의 용무를 끝내고 나의 승용차로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술집에 들어가 낮부터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친구와 우리 집까지 같이 가서 집에서 또 술을 마셨다. 그 친구는 대취하여 택시 편으로 귀가시켰다. 다음날부터 그 친구는 서울에 있는 동창들에게 흥분하여 육이오때 행방불명 되었던 황민재가 살아 있으며 사업도 잘되어 중형 승용차도 가지고 있다며 과장되게 모두에게 알려서 다른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다. 그중에 김00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해방 후에 일본에서 나와 광주에서 같이 학교에 다녔으며 그 친구는 우리보다 두 살이나 위였다. 그는 일본에서 자라서 우리말 억양이 어색했으나 공부도 잘 했으며 문장력도 좋아 중학교 삼학년 때는 친구들 연애편지 대필도 많이 해 주었다. 그와 나는 일 학년 때 그의 집이 있는 광주 광천동에 나의 친척집이 있어 나는 거기에 하숙 하였고 그의 집에 가서 가끔 자기도 하고 걸어서 학교도 같이 다녔다. 가정은 불우한 편이어서 의붓아버지 밑에서 학교에 다녔으며 성이 다른 여동생도 있었다.


내가 이학년 때 하숙을 옮겨서 그와는 더 이상 가까이 지내지 않았고 특히 나보다 위인데다가 나는 체격도 외소해 늘 맨 앞에 앉았고 자연스럽게 서로 멀어졌다. 육이오 이후 그는 조종간부 후보생으로 들어가 조종사가 되었고 나와 만났을 때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공군사령부 작전기획실 실장이 되어있었다. 헤어진 지 이십오 년 후이며 정에 굶주렸던 나는 모두가 반가웠다.


그는 유독 나에게 자주 전화하여 만나자고 하며 자기가 자주 가는 일품요리 집에 가서 술을 마셨으며 매번 영관급 부하 두세 명을 데리고 나왔다. 술값은 번번이 내가 지불했으며 나중에는 응당 내가 지불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른 척 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그의 방탕함이나 염치없음이 조금은 못마땅했으나 조금이나마 내가 경제적인 여유도 있어 모르는 체 하며 부담했으며 자주 만나다 보니 그의 가정사정도 알게 되었고 사별한 전처소생 삼남매와 재혼한 후처 소생 남매 그리고 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까지 모두 육남매의 자식이 있어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한두 번 얼마큼의 금품도 주었다. 그렇게 하기를 반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나에게 자기 사무실에 구경할 겸 놀러오라고 하여 네가 나오면 되지 구경할 것이 무엇이 있겠냐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몇 번이고 오라고 하여 날짜를 정하고 찾아갔다. 사령부 정문위병소에서 용무도 물어보지 않고 주민증과 출입증을 교환하여 주었고 나는 출입증을 목에 걸고 사령부 본 건물로 갔다. 건물 정문에서 다시 먼저의 출입증과 교환하여 새로운 출입증을 주었다. 작전 기획실이 있는 지하에 내려가니 영화에서처럼 철창문에서 총을 멘 초병이 다시 먼저의 출입증과 교환하여 주며 작전기획실 문을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분위기가 으스스하고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 방으로 들어가니 꽤 넓은 방이었으며 몇 개의 책상과 소파도 있었다. 술자리에 친구를 따라왔던 낯익은 영관급 장교도 두 명 있었으며 벽에는 커다란 지도가 가득하게 붙어있었다. 잠시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다음에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또 자기에게 놀러오라고 하기에 번거롭게 왜 내가 거기에 가느냐며 거절하고 술 생각이 나면 네가 나오라고 하였더니 더는 놀러 오라는 말이 없었다. 그와 그렇게 만나면서 해가 바뀌고 일 년 반쯤 지난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집 앞 작은 도로를 나와 큰길에 내 승용차가 막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검정 찦차가 승용차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 곧이어 찦차에서 내린 건장한 사내가 내리라고 손짓을 했다. 영문도 모르는 나에게 그는 신분증을 제시하며 자기와 같이 가야하니 승용차는 그대로 사무실로 보내라고 하였다. 신문이나 소문으로만 듣던 상황이 갑자기 나에게 닥치니 공포에 당황하여 신분증 확인도 못하고 어디로 가는지 물어 보지도 못하고 찦차에 탔다.


육이오 후의 스스로의 행적을 돌아보아 특별히 어떠한 혐의를 받을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어 다소 마음은 가라앉았으나 여전히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가다 보니 차는 남산 쪽으로 가고 있어 더욱 겁이 났다. 중앙정보부는 아닌 어느 이층 건물로 들어갔고 바로 지하실로 안내되어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책상하나를 마주하고 의자 두 개가 있었으며 구석에는 몽둥이도 있었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말로만 듣던 소문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더욱 두렵고 떨리기까지 했다. 조금 후에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남자가 내 맞은편에 의자를 당겨 앉으며 눈인사를 하고 들고 온 서류를 펼쳐 놓고 육이오 이후의 행적을 진술하라며 받아 적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하고 빨치산 이야기부터 시작하니 그가 의외로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면 매우 부드럽게 편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다가 열두시가 가까워 오자 오늘 혹시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느냐고 묻기에 실은 오늘 담당 세무서원과 약속이 있다고 하였더니 찦차를 내 줄테니 세무서 직원과 만나고 한시까지 그 찦차로 다시 들어오라고 하였다. 나는 긴장이 많이 풀려 평소대로 세무서원과 만난 다음 다시 대기하고 있던 그 찦차편으로 한시쯤 도착하여 지하실로 들어갔다.


다시 그 사람이 와서 전처럼 내 진술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진술이 끝나고 오후 다섯 시쯤 일층으로 나를 데리고 올라가 어느 방으로 가서 잠시 앉아 있으라고 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중견 간부인 듯 중후하게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 맞은편앉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실은 당신에 대한 제보가 있어 일 년 이상 조사 했으나 혐의가 없어 사건을 종결짓기 위해 불렀으니 여기 서명하고 나가시라고 하였다.


각서는 거기에 왔다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거기가 공군 첩보대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안도와 허물을 벗었다는 후련함과 함께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며 배신감과 실망 그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후 그는 연락이 없었고 나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 삼개월이 지나 캐나다에 이민간 친구가 서울에 왔다면서 동창들이 모이기로 했으니 나와 달라고 처음 만났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에 가보니 그 친구도 와 있었고 나와 그는 눈만 마주치고 말없이 그와 다소 떨어진 장소에 다른 친구들과 앉았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고 나는 참을 수 없어 친구들 앞에서 큰소리로 이야기하며 그에게 퍼 부었다.


네가 영관급 장교로서 소위 국가의 간성이이라고 하니 내가 의심스러우면 고발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 달에도 몇 번식 보통술집도 아닌 요리집에서 그 많은 돈을 너의 방탕을 위해 허비하게 할 수 있느냐 그 돈은 부모의 유산도 아니고 육이오 후 막노동부터 노점 장사까지 하며 추위에 손에 동상까지 걸려가며 서럽게 번 돈이라고그때야 이제까지 모르고 있던 친구들도 모두 놀랐다. 그 후 그는 장군 진급을 못하고 전역하였으며 몇 년 후 어느 다방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하여 나갔더니 그가 와 있어 만나게 되었다. 그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자며 화해를 청하여 나도 잊어 버렸노라고 말하고 일어섰다. 그의 잘못된 인간성 때문에 서울의 동창 모임에 초대도 않고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잊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글을 쓰니 나도 모르게 가벼운 분노와 배신감이 되 살아났다. 긴 세월 살다보니 이런 친구도 있었다.


익자삼요 손자삼우라는 말이 새삼 절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