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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침입(글/박다인)

2017.10.17 16:48

관리자 조회 수:66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아찔했든가, 어질어질했던가. 어쨌거나 뇌가 마비가 된 듯 잠깐 정신이 외출했다.

인정사정없이 내리 꽂히는 장대비가 북한산 숲을 마구 유린한다. 초록 숲이 속수무책으로 물 폭탄을 맞는 중이다. 그동안 불볕더위로 지치고 울적해 있던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다.
혼자 암스테르담을 여행 중인 딸아이가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곳도 비가 내린다며 외출하지 않고 숙소에 머물고 있는 중이라면서. 여기도 물 세상이라며 초록 숲이 파도처럼 일렁거린다고. 딸애의 목소리에 내심 고맙기도 해 비 내리는 숲 속을 동영상으로 보내주고 싶었다.

세상을 정복하려는 듯 숲을 뒤흔드는 소낙비를 생동감 있게 영상에 담으려고 방충망을 열어젖혔다. 순간, 때를 기다린 듯 갑자기 벌 떼들이 나타났다. 놀래서 황급히 창을 닫는 찰라다. 날쌘 벌 몇 마리는 내 눈 앞에서 앵앵거리고, 미처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들은 분이 났는지 망 밖에서 아우성을 쳐댄다. 갑자기 정신이 까무룩 했다. 정신없이 손을 휘젓는 순간 한 놈이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냅다 침을 꽂은 것이다.

억울하다. 아무 짓도 안했는데 왜 나를 공격하는지. 자랄 때 시골집에서도 숱하게 벌침에 쏘여 온몸 보톡스를 맞았는데. 이유를 굳이 댄다면 숲 속 한편 에 지은 아파트에 세 들어 사는 것이 무단 침입이라는 건가. 급기야 침을 맞은 손가락은 벌게지더니 퉁퉁 부어오른다. 따끔거리고 가려워 온 신경이 그곳으로 쏠린다.

언제부터일까. 내 방 베란다 밖에 주택을 마련한 것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숲이 아니고 하필 삭막한 아파트 벽에 둥지를 틀건 뭐고. 큰 채 하나에 사랑채 격인 작은 채가 두 개다. 반란이라도 일어난 걸까. 아니면 방충망을 사이에 두고 나와 해보자는 건가. 쏟아지는 빗속에서 수십 마리의 벌들이 벌집 주변을 날아다닌다. 혹시 다른 쪽에도 벌집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 가해지는 범죄행위를 우리는 종종 대한다. 일명 ‘묻지 마!’ 범죄다. 꽤 오래전, 전철 안에서 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진 폭력을 목격했다. 퇴근시간이라 전철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화장기 하나 없이 호리호리한 삼십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전철 출입문 쪽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순간 그녀의 평화가 산산조각이 났다.

후줄근한 복장을 한 오십대쯤의 남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여자의 뺨을 연달아 후려쳤기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맞은 그녀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어이없는 사태에 당황하고 있을 뿐 누구하나 나서지 않았다. 가련한 그녀를 보면서 내가 그녀가 아닌 것이 그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그 남자한테서는 고약한 술 냄새가 풀풀 났다. 남자는 왜 일면식도 없는 그녀의 일상에 뛰어들어 몹쓸 짓은 한 걸까.

볼 일을 끝내고 가을빛을 맘껏 받으며 거리를 걷고 싶었다. 구두 밑창을 갈고 한적한 조계사 뒷길로 들어섰다. 저만치에서 감색 잠바를 입은 한 남자가걸어오고 있었다. 내 옆으로 트럭이 세워져 있어 아마도 그 트럭 주인이라 얼핏 생각했다. 그는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고 엉거주춤 옆으로 비키려고 발을 떼는 잠깐 사이, 욕과 침을 뱉으며 내 오른쪽 발등을 무참하게 짓.이.겼.다. 무방비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스타킹은 찢겨졌고 발등은 살갗이 벗겨졌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당한 거지.” 생각뿐, 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는 게 맞을지도. 느긋하게 가을볕을 쬐고 있는 내가 그의 영역을 침범해 화를 돋은 것일까. 어쨌든 그도 예고 없이 내 행복을 짓밟았다.

어떤 사람은 타인의 인생에 참견하길 좋아한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처방전이라며 글로, 말로 날카로운 칼을 들이댄다. 아무리 오랜 세월 인연을 맺었다 해도,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닌 걸 상대방은 알까.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 나도 남도 모르는 내가 있단다. 타인은 또 다른 남의 삶에 일방적으로 무단 침입을 하곤 한다. 마음속에도 넘어서는 안 될 군사 분계선이 있다는 걸 간과한 채.

노벨문학상 수장작인 「운명」은 대학살을 자행한 독일의 만행이 피해를 당한 유대인에게나 야만의 행위를 지켜 본 비유대인에게 똑같이 남긴 정신적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가슴에도 일제의 침략과 6.25의 비극이 아직도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그 피해는 직접 겪어보지 않았던 세대까지도 전해진다. 불청객인 무단 침입은 피해자의 기억 속에 있는 한 여전히 두려움 속에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된다.

이젠 전철을 탈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늘 주변을 살피고 경계하는 마음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벌침 한 방에 손등까지 퉁퉁 부어올랐다. 미물인 벌에게 아주 호되게 당한 것이다. 약이 오른 나는 긴 막대기로 벌집을 떼어내어 아래쪽으로 떨어트렸다. 통쾌했다. 9층 높이에서 떨어진 벌집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하지만 다시 화를 당할 수 없다. 혹여 집을 잃은 벌들이 또 다른 집에 침입해 화풀이라도 할까 염려 되지만.

아직도 내 방 창밖에선 벌들이 호시탐탐 허술한 방충망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