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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글/안무길)

2017.10.17 10:35

관리자 조회 수:71

나는 감동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좋아하니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이번 주 화요일에 둘째 며느리가 첫아이로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우리가 산모와 손자를 보러 병원에 가기도 전에 기쁨에 들떠서 손자의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아직 아들이 이름을 짓지 않았다기에 내가 아들에게 말했다. “너희 부부가 이름을 지을 때까지 나는 감동이라 부르겠다. ‘축복이’(태명)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으니까!” 카톡으로 보내온, 갓 태어난 내 손자의 사진은 내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감동은 단순히 우리 가계를 이어갈 손자가 태어난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한 생명이 잉태된 사실부터 열 달 동안 엄마 배 속에 있다가 건강한 새 생명으로 태어난 - 어느 가정에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사실이 내게는 감동으로 다가온 것이다.

 

현대사회는 옛날보다 감동이 많이 줄어들고 각박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감동은 고사하고 깜짝깜짝 놀랄 정도의 끔찍한 사건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만 해도 인천 여아 살인사건’,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정말 생각하기도, 입에 올리기도 거북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회의와 트라우마를 남겨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동이 더 귀하고 절실해진다.

 

마음속 깊이 느껴 뭉클한 감정이 일어남이라는 뜻을 지닌 감동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동을 받게 될까? 감동은 기대하지 못한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 우리 눈 앞에 펼쳐지거나 경험하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마음속 반응이라 생각한다. 그 반응은 우리에게 기쁨이나 감사함이나 행복을 주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감동은 꼭 엄청난 것이라야 할 필요는 없다. 아주 사소한 작은 것도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좋은 것이지만, 남이 행한 것을 보고 쉽게 감동을 느끼는 것도 비할 바 없이 귀한 것이라 생각한다.

 

감동에 대한 예찬론을 펼치자면 감동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리고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 중의 하나라 생각한다. 그것은 돈이나 권력이나 큰 능력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족하거나 연약하거나 자기를 비운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이다. 감동을 만들어 내는 곳에는 어느 누구의 희생이나 헌신이 깔려 있을 때가 많다. 내 기쁨보다 남에게 즐거움이나 행복을 주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싹틀 수 있는 것이 감동이기 때문이다. 감동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도 필요할 것이고, 남을 위한 수고를 기쁨으로 여기는 마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감동이 있는 곳의 특징은 그것을 만든 사람은 그 선행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감추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감동은 끔찍한 일을 당하여 평생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경우와는 반대로, 누구로부터 받은 감동은 그 사람의 인격과 가치관을 바꿀 만큼 선한 영향력을 가진다. 감동은 우리가 사는 사회를 정화시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누구나 살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데 크게 역할을 하는 것이 감동이다.

 

최근에 내가 받은 감동, 두 가지만 얘기해 보고 싶다. 나는 내가 사는 아파트에 대해 대부분 만족하고 감사하는데 딱 한 가지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있다. 출근을 위해 아파트에 접해있는 지하철역까지 걷는 길은 공원의 산책로와 다를 바 없는 아름다운 길인데, 문제는 군데군데 놓인 벤치 주변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비롯하여 음료수병이나 캔, 빈 과자 봉투 등의 쓰레기였다. 늦은 퇴근 시간에 보면 그 벤치에는 어김없이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그들이 벤치 옆에 작은 쓰레기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담배꽁초는 재미 삼아 주변에 던지고, 먹은 스낵류와 컵라면 등 음식물 쓰레기를 그냥 버려두고 간 것이다. 아파트단지 청소를 담당하는 아주머니가 출근하면 그 지저분하고 무질서한 것들이 정리되겠지만, 이른 아침 시간이니까 그런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그 벤치들을 지나면서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80세는 넘어 보이는 점잖은 할아버지 한 분이 손자뻘도 안 되는 학생들이 던져놓은 담배꽁초를 줍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을 본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출근길에서 그 할아버지를 여러 번 만났다. 할아버지는 워낙 지나가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당연한 일을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할아버지와 얼굴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할아버지를 만나는 날은 아침의 작은 감동을 만나는 날이었다.

 

최근에 나는 정규 신학대학 못지않은 커리큘럼으로 신학을 가르치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입학을 지원하여 합격통지를 받고 등록하여 지난주에 입학예배와 오리엔테이션이 있었고, 이번 주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첫 수업에 들어가 강의를 들었다. 내가 처음 이 학교에 대해 얘기를 들은 건 3년 전쯤이었는데,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다. 지난 6개월 동안에 교회 동료 장로님의 권유로 신학을 가르치는 어느 아카데미에서 한 학기 강의 듣고 난 후에 공부를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을 하던 중에 3년 전 소개 받은 이 학교가 머리에 떠올랐다. 3년 전 나에게 이 학교를 소개해 준 분에게 연락하여 이 학교의 홈페이지와 소개 동영상을 받아보았고, 유튜브에서 이 학교 교수님들의 강의와 설교와 인터뷰 내용도 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 학교에 대해 하나하나 알게 되면서 나는 세상에 이런 학교가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학교는 내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학교의 설립 취지와 그곳에서 섬기는 교수님들을 통한 감동이었다.

 

이 학교는 한국교회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 땅의 교회를 다시 일으키려는 정신으로 8년 전에 세워졌다. 교수님들의 대부분은 소위 국내의 명문대학을 나와 신학교의 석·박사과정은 외국에서 마치고, 국내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분들이 많다. 교수로서 안정적인 대학을 떠나서 이곳으로 온 데는 한 분 한 분 감동적인 헌신과 희생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학교의 학생은 전원이 후원자들의 섬김으로 모아진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고 있으니 교수님들에게 적절한 보수를 지급할 여건이 못될 터라, 대부분 섬기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여건에서 가르치면서도 너무나 밝고 행복한 교수님들의 모습은 감동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한 분 한 분 강의도 훌륭하지만 실생활에서 쉽지 않은 섬김의 삶을 실천하고 있으니 절로 감동하게 된다.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감동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감동예찬론만 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 나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