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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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글/황민재)

2017.10.11 14:07

관리자 조회 수:140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악몽 같았던 내 과거사지만 우리 민족 비극의 한 단면이기에 이글을 적어본다
나는 1950년 11월 특별한 우리 가정의 기구한 운명에 의하여 철없는 어린 나이에 형님을 따라 이른바 빨치산이라 부르는 공비가 되어 산으로 들어갔다.

몇 번의 죽을 고비와 부상도 입고 굶주리며 겨우 목숨을 유지하다가 1952년 겨울 국군의 동계 빨치산 소탕 총공세로 나는 어디인지도 모르는 산중에 버려졌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지리산을 중심한 남한 빨치산은 그때 완전히 괴멸되었다고 한다.

날짜도 알 수 없는 어느 날 그렇게 산속에 혼자 있었다. 너무 많이 쫓겨 다니며 험한 죽음도 많이 보았기에 죽음의 공포는 이미 없어지고 오직 배고픈 괴로움만이 있었다. 그렇게 배가 고파 걸어가기도 서있기도 힘들고 어딘지도 몰라서 어느 나무 밑에 그냥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세 사람이 오고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은 총상을 입어 겨우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체격도 작고 동안이어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그냥 따라 오라고 하였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냥 따라 갔다. 얼마쯤 갔을까 어떤 굴로 들어갔다 과거 빨치산들이 있던 곳인 듯 하였다. 자리를 잡고 앉자 그 중 한 사람이 배낭을 열고 생팥을 꺼내 한주먹씩 나눠주었다 팥은 단단해서 입안에 한참을 물고 있다가 침으로 불려서 씹어도 단단해서 힘들었다. 그러나 배가 고프니 그것도 비린내도 느끼지 못하고 억지로 씹어 먹었다. 간간히 먼데서 총소리 포소리가 들릴 뿐 우리가 있는 곳은 조용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내고 날이 밝았다. 총상을 입은 그 사람이 일어나지 않아 흔들어 보니 이미 죽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우리는 시체를 그대로 둔 채 그 곳을 떠났다.
산속은 너무나 조용했고 얼마쯤 가다가 어떤 은신처로 들어가서 어둡기를 기다려 산을 내려간다고 하였다. 어두워질 무렵 산을 내려가 얼마를 가니 조그만 개천이 나오고 그 옆의 언덕에 수양버들 나무가 줄지어 심어져 있고 언덕 위에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얼마나 갔을까 밤도 꽤 깊은 것 같은데 저 멀리 들 가운데 동네에 불 켜진 집이 보여 앞서 가던 그 사람들은 이 밤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제사 집일거라며 저기가면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 거라며 들어가자고 하였다.

나는 무작정 그 사람들을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부락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요란한 총소리가 났고 우리는 황급히 되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비 잔당들이 부락에 출몰하는 것을 잡기 위해 경찰들이 위장하고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사람은 개울가 언덕길에 올라서자 더욱 세차게 내달리니 나는 도저히 따라 갈수가 없어 언덕 아래로 내려가 수양버들 나무 밑둥을 잡고 아랫도리는 물에 담근 채 웅크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놈도 잡지 못했다며 경찰들이 투덜거리며 지나갔고 한참을 지나서 주위가 조용하기에 언덕에 올라와서 어딘지도 모르며 무작정 걸었다.
들판을 지나 어디쯤가니 부락이 나왔고 배가 고픈 나는 아무 생각없이 부락으로 들어가 그때의 농가에는 대개 부엌문이 없었으므로 맨 처음의 집에 들어가 더듬더듬거리며 항아리를 찾아 뚜껑을 열고 안에 있는 김치를 씹어 먹었다.

그렇게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갑자기 손전등을 비추며 귀밑을 무엇으로 찍어 눌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손전등으로 나를 이리저리 비춰보더니 아무 무기도 없고 체격도 왜소하고 얼굴도 동안이라 대창을 치우라며 그냥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러면서 이구동성으로 어쩌다 어린새끼가 이렇게 되었냐고 측은해 하기도 하였다.
날이 밝아올 무렵 언제 지서에 연락했는지 경찰들이 와서 나를 인수하여 지서로 데리고 갔다. 그 후 경찰서를 거쳐 사단 사령부가 있는 남원의 임시 집결소로 갔다 드디어 포로가 된 것이다. 그때 인민군 포로들은 거제도 수용소로 가고 빨치산포로들은 전남 광주에 있는 서석국민학교에 마련된 수용소로 갔다. 그곳은 내가 중학교 삼년을 다니던 소이기도 하다. 그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 군용 야전 텐트가 많이 쳐져 있었다. 천막 안에는 가운데 복도 양편으로 각 50명씩 100명의 포로가 있었고 잠 잘 때는 서로의 머리쪽에 발을 뻗고 잠을 잤다. 식사 때는 25명씩 두 줄로 마주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으면 병사 두 사람이 식통과 반찬통을 들고 와서 양은그릇에 밥을 퍼 담아 배식을 시작 했다.

그러면 50명이 일제히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린 생각에도 그쪽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운동장에 나가 군가를 배우고 군가에 맞춰 제식훈련을 받았다. 제식 훈련 사이 약 10분씩 휴식시간이 있었다. 남도의 삼월이면 봄이 완연했다. 학교 담장위에는 철조망이 쳐 있고 몇 군데 망루가 있었다. 그럴 때면 허기도 잠시 잊고 어릴 적 동무들과 밭둑을 뛰어 다니며 재잘거리고 놀던 생각이 나서 푸른 하늘과 그 푸른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중학교때 즐겨 읽었던 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시가 생각났다. ‘전라도 길’이라는 시는 맨 끝구절인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만을 알고 있었으나 ‘파랑새’라는 시는 전부 외우고 있어 소리 나지 않게 속으로 외어보고 있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물음 울어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다음 순간 조교의 구령소리에 일어나 다시 군가를 부르며 또 훈련을 시작했다. 포로들은 극도로 위와 장이 약해져서 조금만 음식을 부주의 하게 먹으면 금방 설사가 나고 며칠이 지나면 이질이 되었다. 훈련도 나가지 못하고 삼, 사일 후면 일어나지도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였다. 그러면 병동으로 옮겨졌고 며칠 후면 죽어나갔다. 나도 어느 날 병동으로 실려간 환자가 못 먹은 밥을 식사당번이 나에게 주어서 앞,뒤 생각 않고 허겁지겁 먹었다 갑작스런 과식 탓에 그날 저녁부터 설사를 하기 시작했고 다음날 훈련도 나가지 못했다. 며칠 뒤면 이질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일어나지 못해 병동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공포가 나를 사로 잡았다. 설사와 이질에 잘 듣는 특효약이라는 미제 ‘구와노찡’이라는 약이 있는데 포로들에게는 줄 양이 없어 그냥 죽어나가게 할 뿐이었다.

나는 설사가 시작된 다음 날 역시 훈련도 나가지 못하고 변소를 여러 번 다녔다 오전 중 벌써 세 번째 다녀오는데 저 편에서 위생병 둘을 거느리고 장교중위가 오고 있었다. 나는 그냥 달려가 그 장교의 다리를 붙잡고 사정했다. 나 설사가 이질이 되어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당황한 장교가 어린놈이 왜 이리 되었을까하고 중얼거리더니 위생병더러 그 ‘구와노찡’ 열 알만 주라고 하였고 그 사병은 옆에 차고 있던 허리가방에서 약병을 꺼내 열 알을 세어주며 한 번에 두 알씩 하루 세 번 먹으라고 용법까지 일러주었다.
그 약을 먹고 설사와 이질이 완전히 나았으며 훈련도 열심히 받았다.

또 포로들은 약 10명씩 경비병들의 호송을 받으며 걸어서 재판을 받으러 군법회의장에 나갔다. 군복의 아랫바지 양 무릎위에 검정글씨로 PW라고 써서 전쟁포로 표시를 했다. 한번은 그렇게 군법회의장에 가는데 저만치 아는 사람이 오고 있었다. 한 부락에 살던 초등학교 이년 선배였으며 우리 부락에서 광주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그 선배와 나 두 사람 뿐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 멀리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그 선배도 나를 알아보고 걸어오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가까이 오더니 얼굴을 획 돌려 버렸다. 순간 나는 너무 당황스럽고 슬펐다. 그리고 앞으로 세상의 냉대가 얼마나 크게 덮쳐올까 하는 생각에 무서움마저 느꼈다.

그 이후 나는 몇 십년간을 먼 친척 고향사람 그리고 학교동창들도 가급적 기피하고 살았다. 그해 1953.7.27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십세이하 미성년 빨치산들은 전원 무죄석방의 특명을 내렸다. 10월에 나도 석방되어 아무데도 갈 곳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재산도 없이 냉대와 증오의 눈빛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나는 귀향증 하나를 받아들고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