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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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는 부조리를 다룬 카뮈의 시론이다. 나로서는 철학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 그렇다고 비켜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릴지언정 시도는 해봐야 한다는 만용에서 이 작업을 시작했다.

카뮈는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부조리의 철학이 아니라 부조리의 감성임을 분명히 했다.(13쪽)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15쪽)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죽는 것을 본다. 그런가하면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살아갈 이유를 부여해주는 이념 혹은 환상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야말로 질문 중에서 가장 절박한 질문이다.(16쪽)
카뮈는 ‘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스스로 규정한 자살의 경우 그것은 사회적 현상으로보다는 ‘개인이 품은 생각’과 자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안으로부터 밀착 분석하려 한다.(17쪽) 벌레는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박혀 있다. 바로 거기서 벌레를 찾아야 한다.(17~18쪽) 자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쌓여 온 골병이 밖으로 표출된 것으로서 사회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문제라고 본 것이다.
모든 것은 의식, 즉 생각에 의해 시작 된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정신적 침식으로 골병들기 시작 한다는 것이다.(17쪽) 그 시작에 뒤따르는 ‘과정’이 바로 부조리다. 삶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직시하는 ‘행위’를 카뮈는 ‘명철성’ ‘통찰’ 또는 명중한 의식이라고 부르고 그 명철성을 출발점으로 해 마침내 ‘빛의 밖으로 도피하는 행위’를 자살이라고 부른다.(18쪽) 말하자면 삶의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해 본 결과 삶이란 고통일 뿐이지 살만한 가치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자살이란 얘기다.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멜로드라마처럼 하나의 고백이다. 그것은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17~18쪽)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몸짓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째 이유가 습관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살아야 할 깊은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면, 그리고 고통의 무용함을 본능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19쪽) 이 시론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인 가를 생각해 보는 데 있다.(20쪽)

아침에 기상해서 사무실 혹은 공장으로 출근하여 일하고, 일을 마치면 퇴근, 식사, 수면,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일상은,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이것이 습관의 세계다. 습관은 죽음이 찾아오는 그날까지 무작정 계속될 수도 있다.(29쪽)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습관에 젖어든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 돈을 벌려는 것인데 인생의 모든 노력과 최상의 몫이 이 돈벌이에만 집중되어 버린다. 행복은 잊어지고 수단은 목적으로 변한다.(156쪽) 습관적인 삶 속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질문은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것이다.(246쪽)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습관처럼 살아가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와 같은 질문에 봉착한다. 그리고 아무리 애써도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은 죽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게 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부조리를 느낀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자각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은 더욱더 부조리하다. 늘 같은 일과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디로 향해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침이면 다시 서둘러 하루를 시작한다.”
바쁘게 살아갈 때에는 생각 못 하다가 어느 순간 문득 의식하면서 느끼게 되는 비극, 이것이 부조리다. 부조리는 오로지 우리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54쪽) 따라서 그것에 동의하고 산다면 부조리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이나 세계가 그 자체로서는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모순되는 두 대립 항의 공존 상태, 즉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부조리한 상태라고 했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는 것이다.(35쪽) 그런데 무수한 조각들로 파열된 세계는 돌연 나에게 낯설어지는 세계다. 부조리는 나와 세계와의 관계, 즉 낯섦이다. 나와 세계를 하나로 여겨 왔는데, 돌연 내가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을 의식한다. 그것이 낯섦이다. 설사 시원찮은 이유를 대고서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낯익은 세계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돌연 환상과 빛을 박탈당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낀다.(19쪽)
나에게 낯설어진 것은 세계와 타자만이 아니다. 마침내 나 자신까지 내게 낯선 이방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순간 거울 속에서 우리와 마주치는 그 이방인, 우리 자신의 사진틀 속에서 다시 만나는 친근하면서도 음산한 형제, 이것 또한 부조리다.(32쪽)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 부조리는 ‘단절’이다. 단절은 두 개의 항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이어져 있던 것의 끊어짐이다. 하나였던 것이 둘이 된다. 갈라진 둘은 이제 더 이상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다. 부조리는 나와 세계, 나와 타자, 나와 나 자신 사이의 절연이며 단절이다. 부조리는 인간과 그의 삶 사이의 이혼이며 거기서 오는 낯섦이다. 부조리는 시간에 대한 인식이며 죽음에 대한 명철한 의식 혹은 의식적인 죽음이다.(52~53쪽)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49쪽)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라는 형벌을 내렸다. 그런데 이 바위는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신들은 무용하게 희망 없는 노동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이유 있는 생각이었다.(179쪽)
“현대인들은 종종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주어진 삶에서 벗어나길 갈망하지만 매일 주어진 그대로의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마치 신화 속의 시지프가 돌이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언덕 위로 돌을 굴려 올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부조리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부조리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카뮈는 말한다. 그러나 카뮈는 이 에세이를 통해서 삶이 부조리하다는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부조리를 직시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떨어진 돌을 다시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 크든 작든 자신만의 언덕을 향해 밀어 올리는 또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인류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누리게 된 것은 인간의 대담한 도전과 발상 덕분이다. 비록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 판명 된다 해도, 몇 번의 실패를 거치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수긍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라고 카뮈는 피력했다.
“삶의 끝이 결국 죽음이라면 인생은 부조리한 것이다. 하지만 비록 인간의 삶이 부조리한 것이라 해도 난 계속해서 ‘오직’ 인간이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난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생각하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내 이성을 사용해 끊임없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인간적이지 못한 신의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며 미래나 영원에 대해 희망이나 기대를 갖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의 삶에 충실할 것이다.”라고 카뮈는 결론을 내렸다. 카뮈는 신의 구원이나 미래의 희망보다는 오직 현제를 열심히 기쁘게 살아가는 인간이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