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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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나면서 스치는 바람결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폭염도 오묘한 절기의 위력 앞에서는 별수 없나 보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사상 최대의 인파가 인천공항을 빠져나간다고 연일 보도한다.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걸 보니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지구 끝까지라도 도망갈 기세다. 나만 계절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고 우두커니 땀만 닦으며 지내나 했다. 포기하면 오히려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평창 대관령 음악축제를 빙자하여 1박 2일 서울을 떠나자는 제안에 쾌재를 불렀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헤르만 헤세의 말이 잽싸게 떠오른다. 네 할매가 의기투합했다.

여행의 설렘은 나이가 들어도 도무지 식을 줄 모른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지하철을 갈아타며 부지런히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다. 눈을 비비고 지하철역 시계와 내 시계를 번갈아 살펴봤다. 아뿔싸,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온 것이다. 어떻게 8시를 9시로 착각할 수 있을까. 여태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는데. 건망증도 모자라 이젠 새로운 증상이 틈을 노리고 있나 보다. 아무튼, 늦지 않은 안도감에 한숨을 쉬어 보지만 앞으로 또 무슨 실수를 할지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더위를 피하려고 카페를 찾고 있는데 멀리서 왕언니가 손을 흔들며 걸어온다. 동병상련 처지에 그저 마주 보고 웃을 수밖에 뾰족한 답이 없다.

평창동계올림픽 준비로 도로 공사가 곳곳에서 한창이다. 장마도 끝나고 태풍 노루도 비껴간 화창한 날씨는 강원도의 빼어난 풍광을 더욱 또렷하게 보여준다. 구름은 파란 하늘을 캔버스 삼아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토해낸다. 솜사탕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나 했더니 금방 조개껍데기 모양의 파도 물결로 옷을 갈아입는다. 차창을 뚫고 쏟아질 듯 다가오는 구름을 온몸으로 받으며 우리도 함께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세월 따라 나이 따라 감정의 폭도 확연히 달라지나 보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감탄사로 차 안을 가득 채운다. 시간의 속도에 민감해져 가는 나이 인지라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을 움켜쥘 듯 간절한 몸짓이다.

여행의 즐거움에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열심히 검색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기어코 찾아낸 맛집은 지금도 군침을 삼키게 한다. 봉평메밀 막국수와 메밀 부침이다. 김치를 살짝 넣고 메밀가루와 버무려 얇게 지진 메밀전은 할매들의 입맛에 딱 맞다. 인심도 후해서 양도 푸짐하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토속음식 맛에 서로 흐뭇한 미소를 교환한다. 훗날 다시 오리라 마음먹고 눈도장을 찍어둔다. 두둑이 배를 채우고 나니 어느새 노곤해진다. 예전과 달리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마음은 계속 달리자고 하는데 몸은 쉬자고 한다.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잠깐 눈을 붙인다. 저녁 음악회를 위해서는 충전이 필요하다. 일행과 달리 익숙하지 않은 클래식 음악회에서 체면을 유지하려면 미리 휴식을 취해야 한다.

매너 있는 옷차림은 음악회 기본 상식. 하지만 여름철 휴가지에서 개최되는 음악회는 처음인지라 분위기가 내심 궁금하기도 하다. 허름한 여행 가방에서 각자 준비해온 음악회 의상을 펼쳐 보인다. 다행히 만약을 대비해 배낭에 구겨 넣은 얇은 원피스를 나도 질세라 꺼내어 자랑한다. 서로 이쁘다고 오버하며 깔깔거리는 할매들의 모양새는 영락없는 코미디다. 뮤직텐트 주변으로 하나 둘 관객들이 모여든다. 예의를 갖춘 옷매무새가 예사롭지 않다. 다들 음악회에 어울리는 세련되고 자연스러운 자태다. 어떤 음악애호가들은 음악제가 열리는 동안 쭉 근처에서 머물며 모든 공연일정을 소화한다고 한다. 그들의 여유와 음악을 이해하는 안목이 남의 나라 얘기 같이 들린다.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클래식을 틀어놓는 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객석에서 기다리는 동안 의외로 여러 지인을 만났다. 놀랍다. 음악회를 위해 강원도까지 오다니. 나도 덩달아 그들처럼 음악애호가로 비치는 건 아닌지 머쓱해진다.

한여름 저녁을 화려하게 장식한 멘델스존과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으로 내 품격이 한 계단 껑충 뛰어오른 듯하다. 젊은 피아니스트와 첼리스트의 열정적인 연주에 앙코르 박수가 쏟아진다. 연주자들이 하나 되어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선율에 슬며시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제목도 연주자 이름도 생소하지만 느낄 수 있는 마음 하나로 분에 넘치는 감동에 젖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잠깐 음악에 도취된 후 음악이 없는 세상은..... 운운하며 마음속으로 허세를 부려본다. 왕언니가 눈치를 챘는지 내년에는 통영음악제에 가보라고 강력히 추천한다. 음악회의 여운을 와인과 수다로 밤늦도록 이어갔다.

강원도 여행에서 동해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관광코스. 이튿날 아침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강릉으로 향했다.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를 지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5성급 호텔이다. 생뚱맞게 강릉 바닷가가 아닌 호텔로 직행한 이유는 여행의 고수 두 할매 덕분이다. 이 호텔 로비가 강릉 바다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란다. 숙박비가 워낙 비싸 감히 호텔에 묵을 엄두는 못 내지만 간단한 디저트 비용으로 피서객 기분을 낼 수 있단다. 여행도 역시 많이 다니다보면 꾀가 생기나 보다. 막막하게 펼쳐진 바다는 하늘과 어울려 수평선도 삼켜버린다. 모두 넋을 잃고 한동안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바닷물에 발을담그고 동해에 신고식을 할 차례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뜨거운 모래 위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바닷가로 뛰어갔다. 바닷물은 투명함도 모자라 아예 초록빛을 뛴다. 밀려오는 파도에 놀라 소리치며 뛰어나오기를 반복하다 보니 청춘이 따로 없다. 허공에 두 손 모아 외친다.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한낮의 땡볕에 옷이 흠뻑 젖는다. 누가 감히 왁자지껄 할매 들의 소동을 막을 것인가.

돌아오는 길에 주문진 어시장에 들러 점심 요기를 했다. 날씨가 갑자기 요술을 부린다. 진부령 고개를 넘을 때 하얀 운무가 자욱하게 시야를 가리더니 금방 햇빛이 쨍쨍 내리 짼다. 다시 소나기가 퍼붓는다. 또다시 맑은 하늘로 바뀌더니 이젠 쌍무지개가 뜬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쌍무지개가 한동안 따라오며 다시 오라고 손짓한다. 자칭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세 할매 덕분에 내 마음이 정화된 기분이다. 마음껏 느끼고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그들의 당당함을 따라 하련다.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고 이 땅의 통일을 위해 일하는 그들과 함께한 이틀 동안은 행복과 감사라는 두 단어가 끊이지 않았다.

나이를 세지 않는 세 할매는 지금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고 행복해지자고 입을 모은다. 카르페 디엠, 살아온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은 자만이 깨닫는 참뜻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