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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삶, 나의 삶(글/김연옥)

2017.09.04 09:23

관리자 조회 수:275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는 그다지 읽어 본적이 없는 철학에세이였다. 번역된 문체 때문인지, 철학적 사고를 갖지 않아서인지 읽기 자체가 많이 힘들었다. 정리되지 않으면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성격인데, 머리에도 가슴에도 도무지 와 닿질 않았다. 처음 성경을 읽었을 때 창세기 1장을 반복해서 읽었던 것처럼,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수 밖에 없었다. 버트런드 러셀! 그의 삶을 감히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자면 사랑과 지식탐구를 통해 고달픈 삶을 사는 인생들을 위한 연민의 감정을 글로 표현함으로써, 타인의 삶을 계몽하며 살아왔다고 느껴졌다. 이 책의 요지인 즉 80세 즈음 러셀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추구해온 행복관, 불가지론자로서의 종교관, 다양한 학문에 족적을 남기며 결국은 인간애를 위한 철학으로 귀착하고, 1950년 노벨 문학상 수락 연설문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까지 분석하여 정리한 글이었다. 대략 100여 년 앞선 현대-그의 표현에 의한-를 살았던 영국의 철학자 어르신과 2017년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겹치는 부분도 있고 또 확연히 다른 면도 있음에 놀랍기도, 감사하기도 했다.

1872년에 태어난 러셀은 친가와 외가 모두, 직계 포함 많은 후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명문가 출신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금수저 중 금수저라고나 할까? 그런 그가 끊임없이 행복을 논한 것을 보면 부모님의 부재로 인한 박탈감이 불행의 요인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에 짠한 마음이 들었다.

마주치는 얼굴마다 자국이 있다
나약함의 자국이, 고민의 자국이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해 군중 속에서 불행한 모습을 발견한 러셀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확증편향적인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어릴때 좋아하던 찬송가가♩♪세상에 지치고 죄를 짊어진 채♬라는 곡으로, 겨우 다섯 살 나이에 일흔 살까지의 생에 대한 권태를 일찍이 느끼며, 사춘기 시절 자살의 유혹을 느낀 적도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 서른 살까지만 살고 싶어 했고 다소 염세적이었던 나의 청소년기 모습이 떠 올라 슬쩍 입 꼬리가 올라갔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러셀은 일곱 살 터울 진 형과의 괴리에서 유발된 유년기의 외로움 때문에 진지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철학으로 입문하는 첫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가끔, 둘째들이 첫째보다 뛰어난 어떤 것을 발휘 할 때가 있다. 이것은 동생들이 갖는 가족간의 초기 사회적 열등감에서 비롯된 순기능일진대 러셀도 그런 면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다. 그는 확실한 지식을 논증하고 확증하는 것을 즐겼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수학을 출발로 과학 윤리 역사 사회 정치 등 다양한 분야를 거쳐 철학이야말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지적 상상력을 확대시키는 종합학문으로 여기며 그 가치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

러셀이 십대 중반 청소년이 되었을 때, 종교적인 충동을 만족시켜줄 무언가를 찾기 위하여 잠깐 신앙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불가지론자였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기독교인, 반대 개념의 무신론자, 그리고 존재와 비 존재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없음에 판단을 유보하지만 거의 무신론에 가까운 불가지론자. 이 책의 목차는 자전적 성찰, 행복, 종교, 학문, 정치 5개 분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장 긴 분량의 글을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종교분야였다. 자신이 왜 기독교인이 아닌지, 왜 신을 믿을 수 없는지에 대해 가장 고심한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신의 법칙이 때때로 달라짐이 관찰되어서, 선과 악에 대한 절대 확신이 없어서, 신의 계시가 아닌 초기 역사로 보는 성경관 때문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설이 이교도의 신화에서 비롯 된 것으로 여기는 등. 십여가지가 넘는 원인들을 나열하면서 불가지론자로서의 입장을 밝혔는데 여기서 또 한번 선택적 지각을 택한 러셀을 보게 되었다.

그가 철학을 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로 감각의 기만성을 꼽은 점이었다. 무지개는 어디에 있는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친 사물은 보이는 그대로의 존재인지 의심했지만 그것에 대한 반론을 심도 깊게 다룬 바는 없었다.

사랑을 갈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기본욕구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후 행복하기 위해 취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러셀은 지식과 지혜를 쌓아가는 것을 통해 그것을 채웠고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가문의 이념인 克己好學이 내 안에 자연스레 스미어, 배우고 익히는 작업을 즐기는 중이니까. 그의 정치관 역시 동조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생각이 갈라지는 것이 종교관이었다. 러셀은 24시간 동안 눈에 보이는 증거들이 있다면 신의 존재를 확신하겠다고 고백하였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많은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옷자락을 날리며 지나 간 바람은 잡을 수 있는 건가? 喜怒哀樂愛惡慾 인간의 칠정은 눈에 보이는 건가? 그가 말한 대로 우리 눈에 비친 사물의 모습과 귀에 들리는 소리, 그것 뿐인걸까?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기적의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가 성경을 전체적인 맥락이 아닌 부분적인 구절을 발췌하여 불가지론자의입장에 적용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성경 속 인물들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빼고 기록할 수 있음에도 있는 그대로 다 기록한 것 그것이야말로 신적이 아닌, 오지게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하면 구원에 이름을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그것이 착한 행위로 받는 상이 아니라 선물 같은 것임에 감사할 뿐이다.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이 함부로 사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오히려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일반 양심과 더불어 신앙 양심에 비추어 자신을 한번 더 여과시키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가 하고 러셀은 인생의 노년기에 자신을 돌아보며 "삶 가운데 늘 행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한데 진정한 철학자는 절망과 공포로부터 더 자유로울 가능성이 크다."라고 주장했다. 원초적인 인간의 고독감, 결여, 박탈, 기준 미달에서 오는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을 그는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자신을 행복의 길로 이끌었다. 개인의 삶의 끝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알 수 없지만, 아직 삶의 과정 중에 있다고 여기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러셀보다 어리고 약한 면이 많지만 행복 상위 생활자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그가 부정했던 종교덕분이다. 삶의 고충과 마찰이 없을 수 없겠지만 충만감, 안온, 항상 기쁨 등 긍정적인 감정으로 빠르게 회복되는 이유는 복음이신 그 분이 삶의 자리 빈 부분들을 가득히 채워 주시기 때문이다.
감사로 自足하는 법을 알려 주시고 나아가 知足을 누리게 하시니, 나 사는 날까지 그로 인해 행복할 것이다.

족(足)하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