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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무진기행(霧津紀行) 문장비평

 

작가: 김승옥

발표 시기: 1964년

 

김승옥의 문장은 언제나 살아서 숨을 쉬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의 글에는 군더더기가 없고, 모든 단어와 문단이 계산된 대로 진행된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전개가 주를 이루면서도 창조적이고 신선한 언어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무릇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그의 글에서 소설 문장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무진의 안개 설명

아래 글은 무진의 안개를 서술한 부분이다. 비록 여기에서 무진기행의 주제와는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무진의 안개를 설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의 안개가 무진의 명산물이라는 화자의 주장을 적은 것으로서 한 문단으로 되어 있다. 주제(topic)는 ‘무진의 안개가 무진의 명산물’이라는 뜻을 양괄식으로 서술한 것을 알 수 있다. 주제를 단일 개념으로 제시한 것이 좋다. ‘무진(霧津)’이 ‘안개 나루’라는 의미인 것과 잘 어울린다. 만일 주제를 ‘무진의 안개와 햇빛이 무진의 명산물’이라고 했다면 무진에 대한 이미지가 양분되어 인상적인 글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까지가 안개를 무진의 명산물로 제시한 이유로서 문장론의 용어로는 주제를 뒷받침하는 뒷받침문장이다. 이 글이 논술문이 아니고 소설문이기 때문에 뒷받침문장과 주제 사이에 엄격한 관계를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명산물’의 의미를 ‘명물’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한 것을 크게 나무라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무진의 안개는 어떤 안개인가? ‘밤사이에 진주한 적군’, ‘무진의 둘레에 있는 산들을 유배시키는 것’, ‘이승에 한이 있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 ‘사람들을 주위에서 떼어내는 존재’ 그리고 ‘사람들의 힘으로는 흩어버릴 수 없는 존재’ 등등. 여기에 제시된 안개의 이미지는 한결같이 두렵고, 소외시키고, 좌절시키고, 분리시키는 것으로서 극복해야 할 대상을 나타내는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안개를 흩어버리고 싶지만(무진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어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안개임을 암시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장론에서 볼 때 이 글의 장점이 바로 뒷받침문장들이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뒷받침문장의 내용(표현)이 창조적이라거나 신선하다거나 한 것은 문학 문장의 장점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문장론상으로나 소설문으로서나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물론 여기에도 조그만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에서 사용한 ‘헤쳐버리다’의 용법에 대한 것인데, ‘헤치다’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안개를 헤치다’는 어느 경우나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부적절하다. ‘헤치다’보다는 ‘흩다’를 사용하거나 좀 막연한 표현으로 ‘어쩌다’를 쓰는 것이 작가의 의도에 더 부합할 것이다.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흩어버릴/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2] 여자에 대한 상념

주인공이 무진에 가서 한 여자를 만났다. 무진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 선생과 잠깐 만났지만 오랫동안 사귄 사람처럼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여자와 헤어진 뒤에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장면을 작가는 아래와 같이 적었다.

 

내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 통금 사이렌이 불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요란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길었다. 모든 사물이 모든 사고(思考)가 그 사이렌에 흡수되어 갔다. 마침내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어져버렸다. 사이렌만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 그 소리도 마침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계속할 것 같았다. 그때 소리가 갑자기 힘을 잃으면서 꺾였고 길게 신음하며 사라져갔다. 내 사고만이 다시 살아났다. 나는 얼마 전까지 그 여자와 주고받던 얘기들을 다시 생각해보려 했다. 많은 것을 얘기한 것 같은데, 그러나 귓속에는 우리의 대화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좀더 시간이 지난 후, 그 대화들이 내 귓속에서 내 머릿속으로 자리를 옮길 때는 그리고 머릿속에서 심장 속으로 옮겨갈 때는 또 몇 개가 더 없어져버릴 것인가. 아니 결국엔 모두 없어져버릴지도 모른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 그 여자는 서울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그 여자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얘기했다. 나는 문득 그 여자를 껴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아니, 내 심장에 남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단 무진을 떠나기만 하면 내 심장 위에서 지워져버리리라.

 

만일 사이렌의 추억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이 글이 얼마나 잘된 글인지 이해할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서 자란 요즘 세대에게 사이렌의 추억을 들려주어 이 글의 맛을 이해시키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글만으로도 어느 정도 맛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이 글이 문장론에서 말하는 연결성의 원리를 충실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연결성의 원리란 글의 모든 문장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해야 한다는 이론인데, 어떤 사건을 서술할 때에는 대개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서술하는 것이 보통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시점이 이동하게 서술하거나,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서 시점을 이동시키는 서술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사이렌이 울린 시점에서 시작하여 주인공의 상념이 어떻게 변하는지 시간의 흐름에 맞게 서술되어 있다. 밤잠을 설쳐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순서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서 글이 자연스럽게 읽히고,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물론 중간중간에 나타난 멋진 표현은 이 글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좀더 시간이 지난 후, 그 대화들이 내 귓속에서 내 머릿속으로 자리를 옮길 때는 그리고 머릿속에서 심장 속으로 옮겨갈 때는 또 몇 개가 더 없어져버릴 것인가.”라는 표현은 생각해 내기 쉽지 않은 표현이다.

 

[3] 사랑의 느낌

남녀가 몸을 주고받는 것은 비단 사랑이 기초해서가 아니다. 다만 남자는 여자의 몸을 가지고 싶고, 여자는 남자가 자기 몸을 가지도록 해 주고 싶은 욕망이 접점을 찾을 때에 남녀의 교접이 일어난다. 마치 수요와 공급 곡선이 만나는 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러나 사랑은 그런 육체적 행위만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아끼고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상대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상대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음이 생길 때에 비로소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사랑은 자기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지 않은가? 이런 메시지를 아주 멋지게 드러내 보인 것이 아래 문장이다.

 

한참 후에 여자가 말했다. “선생님, 저 서울에 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여자의 손을 달라고 하여 잡았다. 나는 그 손을 힘을 주어 쥐면서 말했다. “우리 서로 거짓말은 하지 말기로 해.” “거짓말이 아니에요.” 여자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떤 개인 날>을 불러 드릴게요.” “그렇지만 오늘은 흐린걸.” 나는 <어떤 개인 날>의 그 이별을 생각하며 말했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더 가까이 끌어당겨주기로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버렸다.

 

“여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이처럼 매끄럽고 지그시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문장이다. 여자가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한 것을 씨로 삼고,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을 부르겠다고 말한 것을 날로 삼아 사랑을 표현해 내는 빈틈없는 직조(織造) 기술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언어의 한계를 설파한 것으로 보이는 마지막 문장이 참 인상적이다. 언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극히 일부만 표현할 수 있는 불완전한 연장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4] 몇 가지 좋은 표현

이 밖에도 이 작품에는 작가 특유의 좋은 표현이 군데군데 박혀 있다. 작가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묻어나온 문장, 경험에서 우러나온 문장, 이성적 추론으로 만들어진 문장, 재치가 번뜩이는 문장 등 여러 가지 문장이 앞뒤 문맥과 잘 어우러져 좋은 표현으로 나타났다. 몇 가지 예시한다.

 

①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감도 모른다는 듯이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② 박은 가고 나는 다시 ‘속물’들 틈에 끼었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이라고.

③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잘 아는 체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④ 그리고 그때 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서투르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설령 도둑질이라고 할지라도 서투르다는 것은 보기에 딱하고 보는 사람을 신경질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①은 남의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한 것으로서, 남의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는 더 큰 허전함이 돌아오게 된다는 경구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②는 대개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여 남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음을 꼬집은 말이다. ③은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를 주는 말이다. 대개 남을 이야기할 때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을 이야기하기 쉽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 의해서 비난이나 나쁜 평판을 얻기 쉽다. 그러니 섣불리 알은체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지혜의 말로 들을 수 있다.

[5] 서투른 주제화(主題化)

주제화란 주제에 접근하도록 글을 전개하는 기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주제화를 잘 이루어냈는데 아래에 예시한 곳에서는 서투르게 주제화한 것이 역력하다.

 

언젠가 여름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 껍데기를 한꺼번에 맞부빌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 그 개구리 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청각의 이미지가 시각의 이미지로 바뀌어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의 감각 속에서 일어나곤 했었던 것이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반짝이는 별들이라고 느낀 나의 감각은 왜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을까. 그렇지만 밤하늘에서 쏟아질 듯이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보고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던 것은 아니다. 별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나와 어느 별과 그리고 그 별과 또 다른 별들 사이의 안타까운 거리가, 과학책에서 배운 바로써가 아니라, 마치 나의 눈이 점점 정확해져가고 있는 듯이 나의 시력에 뚜렷이 보여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도달할 길 없는 거리를 보는 데 홀려서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순간 속에서 그대로 가슴이 터져버리는 것 같았었다. 왜 그렇게 못 견디어했을까.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있던 옛날 나는 왜 그렇게 분해서 못 견디어했을까.

 

위 글의 전반부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는 이른바 청각이 시각으로 치환되는 경험을 이야기하였고, 후반부에서는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별들이 만날 수 없는 거리에서 오직 반짝이는 것밖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에 자신의 처지를 대입해서 괴로워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각각 다른 주제를 가진, 즉 두 개의 주제를 가진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글은 매우 좋지 않은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문단에 두 주제를 제시해 놓으면 독자가 혼란을 겪게 되므로 문장론에서 가장 기피하는 일이다. 문장의 흐름으로 보면 후반부에 나오는 ‘나와 어느 별과의 거리, 그 어느 별과 다른 별들의 거리’에서 느끼는 좌절감이랄까 안타까움 때문에 괴로워했던 경험 이야기가 중심 주제가 되고 전반부는 그 주제로 접근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전반부를 지금처럼 독자적인 주제로 승화시킨 듯한 구성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독자는 전반부에서 작가의 감수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 감수성이 어떤 형태로 발전할까 궁금한 상태가 될 터인데, 갑자기 “개구리 울음소리가 반짝이는 별들이라고 느낀 나의 감각은 왜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을까.”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독자들에게 “제가 금방 말한 것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독자들의 상상을 깨고 말았다. 거기에 덧붙여서 “그렇지만 밤하늘에서 쏟아질 듯이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보고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던 것은 아니다.”라는 군더더기까지 동원하여 감각의 치환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후반부에 나오는 말을 들으면 실제로 감각의 치환은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럴 거라면 전반부를 그렇게 요란하게 구성할 필요가 없다. 전반부는 후반부의 무거운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서 가볍게 개구리 울음소리에서 별들의 반짝임으로 이행한 뒤에 별들의 거리에서 느낀 경험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것이 좋았다. 아래와 같이 바꾸어 보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여름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청각의 이미지가 시각의 이미지로 바뀌어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의 감각 속에서 일어나곤 했었던 것이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밤하늘을 수놓고 있던 별들을 쳐다보았다. 별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나와 어느 별과 그리고 그 별과 또 다른 별들 사이의 안타까운 거리가, 과학책에서 배운 바로써가 아니라, 마치 나의 눈이 점점 정확해져가고 있는 듯이 나의 시력에 뚜렷이 보여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도달할 길 없는 거리를 보는 데 홀려서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순간 속에서 그대로 가슴이 터져버리는 것 같았었다. 왜 그렇게 못 견디어했을까.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있던 옛날 나는 왜 그렇게 분해서 못 견디어했을까.

이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개구리 울음소리에 관한 이야기가 주인공과 여자 사이에서 나왔고 지금 이들이 논 곁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개구리 울음소리를 넣게 되었겠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개구리 울음소리는 이 부분에서 별로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후반부의 주제인 ‘주인공의 별에 대한 생각’을 독자가 이해하는 데 훼방을 놓는 기능을 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개구리 울음소리에서 수많은 별을 보는 감각의 이동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하고 여기에서는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6] 지나친 수식어

사물이나 동작의 특징이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사어나 관형어 같은 수식어를 쓰는 것은 중요하고 유용한 일이다. 다만 모호하거나 복잡한 수식어를 사용함으로써 문장을 불필요하게 중의적으로 만들거나 난해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 글에도 그런 문제가 있는 문장이 몇 보인다.

 

① 나는 얼마 전까지 그 여자와 주고받던 얘기들을 다시 생각해 보려 했다.

 

‘얼마 전까지’가 동사 ‘주고받던’을 꾸밀 수도 있고, ‘생각해 보려 했다’를 꾸밀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수식한다고 해도 해석에 무리가 없는 문장이다. 물론 앞뒤 맥락을 보아서 ‘주고받던’을 꾸미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중의적으로 해석되는 이유는 ‘얼마 전까지’가 시간을 특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를 ‘조금 전에’로 고치면 이 부사어가 ‘주고받던’을 수식한다는 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과거 회상을 나타내는 ‘주고받던’보다 단순한 과거 시제인 ‘주고받은’을 쓰면 ‘조금 전에 주고받은’으로 쉽게 연결될 수 있게 되어 중의성이 그만큼 사라지게 된다.

 

② 우리는 우리가 찾아가는 집에 도착했다. 세월이 그 집과 그 집 사람들만은 피해서 지나갔던 모양이다. 주인들은 나를 옛날의 나로 대해주었고 그러자 나는 옛날의 내가 되었다. 나는 가지고 온 선물을 내놓았고, 그 집 주인 부부는 내가 들어 있던 방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서,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

 

이 문단의 주인공이 여선생과 과거 하숙집을 찾아가서 통정한 사실을 주인공의 시각에서 서술한 것인데 밑줄 친 부분의 긴 부사어가 무슨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이런 긴 부사어가 필요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주인공이 굶주린 여자의 욕망을 해소해 주었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지나친 부사어로 인해서 오히려 의미 전달이 어렵게 되었다. 간단히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7] 단편적인 잘못

이 작품에는 우리가 흔히 비문법적인 문장이라고 하거나 외국어 투 문장이라고 하는 부류의 문장이 없지 않다. 몇 개 예시한다.

 

① 내가 나이가 좀 든 뒤로 무진에 간 것은 몇 차례 되지 않았지만 그 몇 차례 되지 않은 무진행이 그러나 그때마다 내게는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였었다.

 

위 문장에서 밑줄 친 부분이 외국어 투라고 하는 표현이다. ‘도망하다’에 어울리는 처소격조사는 ‘로부터’가 아니라 ‘에서’이다. 이 부분을 국어답게 고친다면 ‘실패에서 벗어나고 싶을’처럼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②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 그렇다고 무진에의 연상이 꼬리처럼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은 ‘연상’을 주어로 삼았기 때문에 서술어를 이에 호응시키기가 쉽지 않게 되어 있다. ‘연상’이란 어떤 개념에서 새롭게 다른 개념이 떠오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므로, ‘무엇에의 연상’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 ‘무진으로 연상되는 것은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 그렇다고 이 연상이 꼬리처럼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는 것은 아니다.’처럼 고칠 수 있겠다.

 

③ 그때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였다. 6․25 사변으로 대학의 강의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기차를 놓친 나는 서울에서 무진까지의 천여 리 길을 발가락이 몇 번이고 불어터지도록 걸어서 내려왔고 어머니에 의해서 골방에 처박혀졌고 의용군의 징발도 그후의 국군의 징병도 모두 기피해버리고 있었다.

 

위 문장에서 밑줄 친 부사어가 꾸밀 서술어가 마땅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강의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 글은 일견 ‘대학의 강의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기차를 놓쳤다’의 뜻으로 오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상식에 부합하도록 쓴다면 ‘강의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무진으로 내려왔다.’라고 서술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지막 기차를 놓쳤다’를 굳이 넣으려다 보니 무리한 문장을 구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기차 이야기를 넣으려면 ‘기차를 타는 것’과 ‘걷는 것’이 대비되어야 할 것이다. 아래와 같이 바꾸는 것을 상정해 보자. 독자들도 각자 이 글을 고쳐보기 바란다.

 

그때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였다. 6․25 사변으로 대학의 강의가 중단되자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려 했지만 마지막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서울에서 무진까지의 천여 리 길을 발가락이 몇 번이고 불어터지도록 걸어서 내려왔고, 어머니에 의해서 골방에 처박혀졌고, 의용군의 징발도 그 후의 국군의 징병도 모두 기피해버리고 있었다.

 

④ 그들은 책가방이 주체스러운 모양인지 그것을 뱅뱅 돌리기도 하며 어깨 너머로 넘겨 들기도 하며 두 손으로 껴안기도 하며

 

위 문장에서는 ‘주체스러운 모양인지’가 어색한 표현이다. ‘모양’이 의존명사로 쓰이는 경우에는 앞에 동사나 형용사의 관형사형이 와서 그 동사나 형용사로 추측함을 나타낸다. ‘주체스러운 모양이다’라고 하면 ‘주체스러운 것 같다’, ‘주체스러운 모양이지?’라고 하면 ‘주체스러운 듯하지?’, ‘주체스러운 모양이군’이라고 하면 ‘주체스러운 것 같군.’처럼 ‘모양이다’ 속에 이미 추측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다/이군/이지/이니’처럼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어미를 써야 한다. 그런데 ‘주체스러운 모양인지’에서는 불확실한 판단이나 막연한 의문을 나타내는 어미 ‘-ㄴ지’를 붙임으로써 이중의 추측을 나타내는 꼴이 되어 어색해진 것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은 책가방이 주체스러운지 그것을 뱅뱅 돌리기도 하며 어깨 너머로 넘겨 들기도 하며 두 손으로 껴안기도 하며

 

⑤ 그 여자는 개성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⑥ 청각의 이미지가 시각의 이미지로 바뀌어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의 감각 속에서 일어나곤 했었던 것이다.

 

예문⑤는 ‘얼굴을 가지고’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 동사 ‘가지다’를 영어의 ‘have’ 동사처럼 사용한 것인데, 국어에서는 ‘얼굴을 하고’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일반에서 자주 쓰는 ‘만남을 가지고’도 그냥 ‘만나고’처럼 단순하게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예문⑥은 ‘바뀌어지는’의 구조가 부적절하다. ‘바뀌다’가 이미 ‘바꾸다’의 피동형인데 여기에 다시 피동을 나타내는 ‘-어 지다’를 붙인 것은 이중 피동이 되어 부적절하다. 그냥 ‘바뀌는’이라고 하면 된다.

 

[8] 맺음말

구성이 탄탄하고 표현이 절제되어 있는 작품에도 뜯어보면 이처럼 티가 많이 보인다. 이런 티를 제거하는 것이 작가에게는 퇴고 작업이 될 것이고, 출판사에게는 교열 작업이 될 것인데 우리 문학 풍토에서는 이 작업이 진지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작가를 위해서나 독자를 위해서나 우리 문학을 위해서나, 조금이라도 더 완전한 작품을 내놓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완전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해 주기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