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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 홍정민

2015.08.09 17:05

관리자 조회 수:3793

통영

틔움 10기 홍정민

 

일상에서 여행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고려한다면 매년 같은 도시로 여행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 판에 박힌 일상에 지쳤거나 새로운 경험과 낯선 풍경이 주는 신선함을 즐기는 여행자들은 대게 이전까지 가보지 못했던 색다른 장소에 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주말과 공휴일, 그리고 조금은 여유로운 방학을 가진 직장인으로서 일탈의 짜릿함을 느끼고 에너지를 충전하고자 새로운 곳을 찾아 부단히 움직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아무 연고도 없는 작고 먼 도시 통영이 내게 있어 제 2의 고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타지에서 대학 생활을 했으므로, 또 첫 근무지로 일하게 된 도시에서도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내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기에 제 2의 고향이라는 수식어는 이 외의 곳에 쉽게 내어줄 수 있는 애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통영이라는 곳은 어느새 내게 성큼 다가와 여행지 이상의 연대감을 갖게 되었다. 7년간의 방문,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열흘까지 총 20일이 넘는 체류 기간. 그 동안 통영은 매년 조금씩 달라진 모습으로 작고도 매력적인 민낯을 구석구석 보여주었다. 매 번 갈 때마다 알아채는 통영의 소소한 변화만큼이나 그를 향한 나의 애정도 켜켜이 쌓여갔다.

이제 익숙해진 거리나 동네를 산책하는 듯 느껴지는 통영에 대한 포근함 이면에는 혼자서 수백 킬로미터를 다섯 시간이 넘게 달려야 하는 적잖은 부담감이 있었다. 애정과 수고가 있어야 닿을 수 있는 곳. 통영까지의 거리가 상당한 만큼 원하는 때에 즉흥적으로 가기가 쉽지 않은 곳이지만 오히려 적당히 먼 물리적 거리는 일상에서 통영에 대한 그리움을 배가시켰다. 그리하여, 나는 마치 멀리 군대 간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과 같은 반가움과 애틋함으로 매년 그 곳으로 향하고는 했다.

통영과의 첫 만남은 2003년 여름, 대학교 동아리의 도보여행에서 잠시 들렀던 일정을 통해서였다. 진주에서 시작한 도보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거제도였고 우리의 일정은 원문 검문소라 불렸던 통영의 초입을 지나 곧바로 거제로 향하는 것이었으나, 경사진 국도를 힘들게 올라 잠시 쉬며 내려다 본 통영 먼발치의 이국적인 풍경에 반해 즉흥적으로 몇 시간을 더 보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8월 불볕더위 속 스물 언저리의 도보 여행자들은 통영 무전동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의 야자수를 배경으로 얼굴이 상기된 채 십여 년이 지나도록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줄 알았던 야자나무가 통영에서도 자라다니, 당시엔 무척 신선하던 풍경이었다. 원문로 야자수 길에서 이어지는 평인일주로를 품은 통영의 잔잔한 바다는 우리의 고된 도보 일정에서 처음으로 조우한 바다인 셈이었으므로 그 평화롭고 이국적인 배경은 자연스럽게 기억 속에 박제된 채 아직까지 생상하게 남아있다.

두 번째 만남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나 아마추어 동호회에서 뮤지컬 공연을 올리게 되면서 이뤄졌다. 통영국제음악제에 참여하게면서 3월 마지막 주 토요일 저녁 5시에 통영에 도착하여 공연을 하고, 짧은 밤 여행에 이어 찜질방에서 여독을 푼 후 다음 날 일찍 서울로 돌아오는 빡빡한 일정이라 통영과 제대로 마주할 여유는 없었다. 동피랑이라 하는 벽화마을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그 곳이 이 도시에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고, 인적이 드물었던 그 봄날 밤 동피랑에서 내려다 본 강구안과 통영항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져서 이곳을 다시 꼭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다음 해 봄이 되어 맞은 생일은 마침 토요일이었고 부모님께서는 주말을 맞아 집을 비우셨으며 나는 생일을 온전히 스스로 즐기기 위해 이틀의 시간동안 무엇을 해볼까 하다가 통영에 다시 가기로 결심했다. 혼자 하는 장거리 운전에 대한 준비도, 먹을 곳, 갈 곳, 잘 곳에 대한 정보도 전무한 상황이라 며칠 동안 통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혼자 하는 여행도, 혼자 하는 장거리 운전도 처음이라 무척 긴장됐지만 이 모든 것은 원하는 걸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그 당시 내 상황과 약간의 흥분 상태로 내린 즉흥적인 결심을 통해 실행에 옮겨질 수 있었다.

3월의 통영은 여전히 추웠다. 내게 3월은 매년 겪는 일 년 과정의 첫 단추이면서도 결코 만만하게 여겨지지는 않는 통과의례의 시간이다. 쌓이는 경력을 따라 가지 못할 만큼 여유가 적고 힘든 시기이다. 꽃샘추위로 인해 서울에서의 3월은 봄이 아닌 듯 했지만 서울에서는 느끼지 못할 포근함이 저 먼 남쪽 도시에서 잔잔한 바닷바람을 타고 또 키 큰 야자수와 선명한 꽃잎을 타고 내게 전해졌다. 그렇게 이뤄진 통영으로의 첫 여행은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보고 먹어봐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하기보다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공기와 조금은 이르고 낯선 봄내음으로 짧은 하루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날 밤은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날이기도 하다. 통영에서의 신선한 행복감에 빠져 있을 때 동시에 느껴야 했던 차가운 서해 바다에서 스러진 천안함 용사들에 대한 애통함. 이 극명하고 부조화스러운 감정의 조합은 결코 반갑지는 않지만 통영에 있을 때마다 불쑥 찾아오는 익숙한 처연함이 되었다.

서울에서 느낄 수 없는 해방감과 남도 특유의 봄바람, 바다 내음이 좋아 이듬해에도 통영을 찾았다. 그곳은 점점, 내가 느끼는 진정한 봄의 신호이자 만만치 않은 3월을 무사히 보낸 포상 휴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동피랑, 강구안, 달아공원, 세병관, 충렬사,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와 미륵산 등 이전에 방문했던 유명 관광지를 다시 둘러보게 되면서 이 도시를 느끼는 데 있어서도 한층 여유가 생겼다. 위 코스로 이뤄진 다소 정형화된 1박 혹은 2박의 통영 여행 코스를 벗어나 이곳을 더 깊이 알고 싶기도 했다. 다음 해에도 여전히 3, 4월 통영에서만 맡을 수 있는 연안의 봄내음이 여전히 그리웠지만 여름을 이용해 더 긴 시간을 통영에서 보내기로 하고,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동행자도 없는 진짜 내 맘대로의 시간을 계획했다. 그렇게 각각 나흘과 열흘의 시간을 함께 하면서 통영 이 곳은 나와 무언의 대화를 함께 했고 나만의 통영을 그려볼 수 있는 배경을 펼쳐주었다.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에나 비슷한 모습을 한 달동네가 있겠지만 동피랑은 그런 마을을 철거와 개발의 획일화된 방식을 벗어나 주민과의 공존과 화합으로써 실현해낸 대표적인 마을이다. 동쪽에 위치한 벼랑이라는 뜻의 동피랑. 동서남북 방향의 고지에 포루를 설치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동포루 복구와 공원 조성사업을 위해 철거의 위기에 놓여있던 허름한 마을은 그러나 이곳의 가치를 알아본 시민단체에 의해 벽화 사업이 시작되면서 바닷가를 낀 언덕 위 벽화마을이 되었다. 또 동포루 역시 복원되어 동피랑의 꼭대기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통영의 과거와 오늘의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이곳의 벽화는 격년마다 새로 칠해진다. 봄에 단장을 완료한 상태로 맞이한 아직은 뽀얀 벽화의 주인공은 겨울왕국의 엘사, 통영이 낳은 엔터테이너 허경환, 얼마 전 여행 프로그램 촬영차 다녀간 아이돌 비원에이포의 흔적, 충무공 이순신의 거북선과 통영의 거장 윤이상, 그 전부터 늘 인기 장소였던 날개 벽화에 더해 두 번째 날개 벽화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곳은 이름처럼 비밀스러웠던 시크릿 가든이라는 제목의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작품이 축대와 담장을 이용한 것임에 반해 이 곳 시크릿 가든은 주민이 살지 않는 폐가 전체를 신비로운 분위기로 활용한 곳이었다. 동피랑에서 제일 유명한 날개 벽화의 좌측에 위치한 이름 그대로의 시크릿 가든. 마침 사람들이 날개 사진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 줄 서서 기다리느라 바로 왼쪽 축대 위의 작은 집은 발견하지 못한 듯 했고, 얼떨결에 혼자 이 짧고 경사진 시크릿 가든의 입구를 향해 올랐다. 초록빛 우거진 벽화가 시간을 더해 바래고 부스러져 멋을 더했다. 온전히 남아있는 방문엔 이 성이 독일에서 옮겨와 4대가 함께 살던 곳이라는 장황한 글이 문짝 가득 단정하게 쓰여 있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지만 그 곳에 서 있으니 왠지 믿고 싶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집을 덮고 있는 색감은 전체적으로 따스했고 그림도 아기자기했으나 으슥한 빈 집에 홀로 올라와 있으려니 으스스했다. 휑한 지붕을 가르는 바람과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 때문인가. 짙은 여름, 여러 종류의 뒤섞인 잎사귀에 무성하게 덮여버린 모습이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그런데 막상 비탈진 작은 성에서 4대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이 작은 집과 집에서 이야기하는 성이 언뜻 연결이 잘 되지 않았는데 집의 구조가 아닌 벽화를 바라보니 크지 않은 안방엔 넓은 테라스와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작은 방도 그림으로는 미처 잴 수 없는 큰 공간이다. 이런 비밀을 숨기려 이렇게 동피랑 언덕 뒤 켠 높은 곳에 지어두고 그것도 모자라 한여름 무성한 잎사귀로 덮어두었나보다.

이런 동피랑이 벽화마을로 다시 태어난 지도 6년째이다. 망치대신 붓을 들고 세월의 고단함을 철거해버린, 다 허물어져가던 언덕 위 낡은 집들이 새 단장을 후 세상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지를 받게 됐지만 겨우 몇 달 전에 복원된 동피랑의 정상인 동포루에 올라서면 여황산 위 북포루 말고도 작은 정자 같은 포루가 저 멀리 하나 더 보인다. 그리고 그 곳 아래의 동피랑과 견주어질만한 동네도. 이곳은 서포루이자, 서피랑 마을의 꼭대기이다. 맨 처음 서피랑을 찾았을 때,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몸이 그리 고생하지는 않았으련만, 뙤약볕에 한 시간 넘게 미로 찾기를 하듯 좁은 언덕 골목골목을 오르락 내리락했다. 늘 가던 충무교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골목길을 올랐는데 조금 오를 만하면 길이 막혀있거나 생각한 것과 반대 방향이어서, 그렇게 걷다보니 언덕의 능선을 따라 난 골목을 뱅뱅 돌아 어디론가 떠밀려가는 느낌이었다. 언덕이 높아지자 폐가도 더러 보였다. 옛날 이 곳에는 뱃사람들이 이용했던 홍등가도 있었다하고, 길 이름도 부둣가 근처라 창고가 많았던 곳이라 하여 창동길, 선창길로 이어졌다. 정수리에 직사광선 쬐며 골목 탐험하는 일에 지쳐 포기하고 싶었던 찰나, 서피랑길을 발견했다.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구십구 계단을 만나 위쪽으로 더 오르니 어느 블로그에서 봤던 폐가가 보였다. 문짝은 이미 뜯겨나가고 유리 창틀마저 모두 들여져나간 시원시원한 집의 골조 사이로 서피랑 아래에 빼곡히 박힌 작은 주택이 꼭 바위에 붙은 따개비같이 빛났다.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 쯤 모습을 드러낸 서포루. , 이 더위에 낯선 동네에서 경사진 곳을 오르는 사람은 나뿐일 거라 생각하며 웃었다. 정자 위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흰 셔츠에 단정한 양복바지 차림의 할아버지가 정자에 앉아계셨다. 그 곳을 한 바퀴 돌며 경치와 바람에 감탄할 때쯤 할아버지에게서 저런 말씀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민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통영 이야기. 칠순이신데도 정정하셨고 말씀엔 여유가 묻어났다. 태어나신 이후로 통영을 뜬 적이 없으셨고, 현재 가게 일은 내려놓고서 향토문화원에서 봉사하시거나 매일 그 곳에 올라오는 게 낙이라고 하셨는데 왠지 다음 해에 방문해서도 뵐 수 있을 것 같았다. 서피랑, 서포루는 아직 개발이 진행 중인 곳이라 다음번엔 아마도 제일 많이 변한 곳이 아닐까 싶다. 한 폭 그림의 배경과 같은 굽은 길을 내려오면서 할아버지께서 말동무 떠난다며 계속 보고 계실 것 같은 느낌에 왠지 계속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게 됐다.

동피랑이나 서피랑과 같이 통영의 지명은 이 지역만의 느낌이 물씬 나는 고유어들이 많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길 이름 유심히 살피던 나는 동피랑 아래의 통새미길, 서피랑길과 닿아있는 뚝지먼당길, 가죽고랑길, 사람들이 간혹 통영항이라고 잘못 부르기도 하는 강구안길 등, 익숙하지만 뜻이 궁금했던 곳이 적지 않았는데 게스트하우스에서 발견한 통영지명 유래집을 통해 이런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결했다. 강구안에는 지금도 거북선을 비롯한 꽤 많은 소형어선들이 정박해 있는데 예전엔 이곳을 통영항으로 부르다가 여객터미널이 생기면서 이름을 그 곳으로 넘겼다고 한다. 이 강구안길은 통제영 시절부터 큰 배가 정박했던 항구인 강구 해안의 안쪽 골목길이며, 강어귀를 뜻하는 강구가 통영항의 육지 깊숙히 들어온 모습을 칭하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일부를 매립해 문화마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통영항, 아니 강구안길이다. 뚝지먼당은 군기를 수호신 삼아 지내던 뚝제를 지내던 언덕이며, 쌍새미길, 통새미길 등의 새미는 물이 솟는 샘이 유난히 많던 통영의 길 이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강구안과 동피랑, 통새미 길은 모두 같은 동네에 위치한 곳이다. 동피랑처럼 재생사업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곳도 있지만 사실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곳이 여기저기에 많다. 강구안과 통영의 중앙로만 보더라도 건너편의 청마거리와 세병관, 강구안 문화마당과 중앙시장, 동피랑 마을은 이미 새롭게 정비를 마쳤건만 유독 강구안길과 중앙로 사이 길의 골목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남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최근 이 곳에 시작된 사업 중 하나인 강구안 골목 친환경 간판 프로젝트. 낡고 오래된 외관은 재래시장보다는 전통적이라거나 역사적인 곳일 것이란 믿음이 부족해보였고, 오며 가며 관광객으로서 사진 한 장 찍을만한 세련미도 없었으니 이 곳 가게들의 깊은 의미가 무엇이든 양 옆 번화가에 눌려 퇴색되어 버렸다. 중앙로 건너편의 항남 일번가와 함께 통영의 명동이던 이 곳. 유치환, 김춘수와 같은 당대의 유명 문인들이 자주 찾던 통영의 학림다방'이 있었으며, 간판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 태어난 가게 이력을 자세히 보니 40년에서 60년의 대를 잇는 역사는 예삿일도 아니었다. 그 시절의 흑백 필름이 고운 색감을 입은 느낌이었다.

문인들,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는 통영이다. 혼자서 한 여행이 대부분이었던 지라 그 곳에서 딱히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닌데도 통영을 생각하면 말없어 지루했던 기억이 없다. 외려 서정적인 사연이 곳곳에 숨어있는 이 작은 연안 도시의 잔잔한 호흡이 시간을 뛰어넘어 와 닿아서 매번 새로운 것이 눈에 띄고 마음이 더 깊어지는 재미난 곳이다. 재작년부터 관심을 갖게 된 통영 출신 예술인들의 삶 이야기. 다양한 통영 책자에도 소개된 청마와 정운의 곱게 빛나지 못할 연정이 내겐 제법 울림이 있었다. 백석, 윤이상, 박경리, 전혁림, 김춘수에 이중섭까지 전에는 몰랐던, 이름이나 겨우 알던, 자습서대로 기능적인 분석만 하며 이해도 공감도 못하던 구절이 바로 이곳에서 그들에게 벌어졌던 삶이 내린 형벌이자 축복임을 알게 됐다. 시인은 사랑하면 시를 쓰고 화가는 사랑하면 그림을 그린단다. 난 무얼 했을까? 도시에 예술적 기운이 충만하니 그 삶 자체가 사랑이겠지만, 아지랑이같은 연정에 피해갈수 없는 한이 더해지니 걸작은 운명이었네라. 근현대 예술가들이라 어쩔 수 없이 시대적 상황이나 당시 관습에 의해 억압받고 힘들어했다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통영이란 곳은 그런 시련도 풍부한 예술적 축복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눈으로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곳 말고도 그들의 일생에서 통영이 함께했던 곳에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면 예술가를 위한 자양분이 곳곳에 듬뿍 심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불과 사, 오십년 전 이 건물, 흔적에 내가 서있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니, 신기하다. 내가 통영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우리나라 최장 케이블카로 유명한 통영 미륵도의 한려수도 해상 케이블카. 미륵산은 케이블카를 타고 세 번을 다녀왔다. 늘 긴 줄을 기다려 케이블카를 타고 줄 지어 전망 데크로 이동했으며, 붐비는 인파 없는 경관을 사진으로 남기기 힘들만큼 관광객이 많은 곳이지만 그럼에도 미륵산 정상에서 둘러 바라보는 통영과 남해의 경치가 정말 좋아서 그 수고가 전혀 아깝지 않은 곳이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땐 바람이 불어 케이블카 운행이 중단된 날이어서 미륵산 북쪽 자락 봉평동의 용화사라는 절에서 시작하는 둘레길을 타고 오르기로 했다. 중간 즈음의 공원과 약수터까지 관리 차량이 오를 수 있도록 날찍한 길이 만들어져 있어 편히 걷기에 좋았다. 정상을 거치지 않고 미래사에 도착했다. 여느 절답지 않은 작고 아기자기한 규모와 담백한 모습에 반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진짜 매력은 절을 감싸고 있는 편백나무 숲이다. 절 외부에서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는 미륵불로 향하는 길이 편백나무 숲길인데 백 여 미터 짧은 길이지만 양 옆에 쭉쭉 뻗어있는 나무가 참 듬직했다. 편백나무 한 가운데서 치유받는 느낌으로 걷다가 만나는 미륵불이 바라보는 탁 트인 남해 바다 조망도 참 평화롭다. 미래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륵산의 정상은 사람들로 가득했던 그간의 모습과 달리 텅텅 비어 한 편으론 낯설었지만, 그 배경 자체는 단연 최고의 경험이었다. 이렇게나 탁 트인 모습이라니! 바람이 세서 한산대첩 전망대로 내려갈 땐 전에 없던 고소공포증이 도는 듯도 했다. 처음 미륵산 정상에 올랐을 때 학익진 전법의 실제 장소를 눈앞에 두고 직접 그려볼 수 있다는 게 제일 신기했고 벅찼다. 물살 센 견내량이 거제대교 아래이고, 한산대첩이 마리나 리조트 바로 옆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페이스트리 빵과 같은 역사의 지층이 아주 얇게 그리고 느리게, 지금도 한 겹 한 겹 쌓이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전엔 통영 시내 전경이 눈에 먼저 들어왔지만 익숙해진 통영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섬이 층층이 쌓인 안내 사진의 맨 뒤 좌측 끝엔 대매물도와 소매물도, 우측 끝엔 욕지도, 그 바로 왼편엔 연대도. 그저 수많은 섬일 뿐이던 풍경이 이젠 각각의 이름으로 다가왔다. 이 풍광을 눈앞에 두고 정말 멋진 시를 남긴 정지용 시인, 이곳을 오른 이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비를 감상했다.

내 기억 속 통영의 첫 인상이던 원문고개 내리막길의 야자수는 몇 해 지나지 않아 종려나무로 바뀌었고 그 겨울 추위에서 살아남은 야자수는 여객선 터미널 앞으로 옮겨갔다. 키가 작은데다가 야자를 닮아 알차게 생긴 종려나무. 영화에서나 보는 줄 알았던 종려나무가 남해에서 흔한 것인 줄은 몰랐다. 그 후로는 곳곳에서 종려나무가 눈에 띄었는데 충무마리나 옆 정원에 있는 한 종려나무와는 매년 나란히 서서 키 재기를 하기로 했다. 매년 만나고 싶은 나와 통영의 약속이다. 이 모든 인연은 내가 혼자 통영을 방문하면서 더 깊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지에서 옆에 내 감정을 순간순간 나눌 이가 있었더라면 그 사람과의 인연이 깊어졌을 텐데, 당시 느낀 다양한 감정을 받아줄 이는 통영 자신뿐이었다. 한 걸음씩 내딛으면서 나는 나 자신과 그리고 이 도시와 무언의 대화와 애정을 이어왔다. 통영의 오랜 숨결이 걸음을 내딛는 곳곳에서 느껴졌다. 굵직굵직한 역사가 바닷바람을 타고 현재의 나에게로 전해지고, 햇살에 눈 부시는 항구를 더 아름다운 예향으로 일궈낸 예술인들의 사랑이 여전히 빛을 발하는 곳. 그들의 시간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통영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