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어 이야기

  • home
  • 게시판
  • 오늘의 국어 이야기

김미정 님의 '한글 가온길 답사기'

2015.06.05 23:07

관리자 조회 수:6954

한글가온길을 다녀와서

- 한글의 의미 -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이야.

_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

 

저는 새 글자가 나오면 꼭 배우고 싶어요.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 이름을 쓸려고요‘”

글자는 단순히 글자이기만 한 걸까? 그건 아니다. 그랬다면 이름 하나 쓰려고 새 글자를 꼭 배우고 싶다고 소녀가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왕은 새로 글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왕에겐 글자가 있었으니까. 글자는 사람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항간에 떠도는 말까지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다. 임금이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251230

그럼 세종이전에는 글자가 없었는가? 한자를 사용했다. 한자는 뜻글자이다. 새로운 뜻이 생길 때마다 글자가 생기는, 그래서 한자의 수는 수만 수천(현재 85천 여자)자에 이르렀다. 한자는 하나하나의 음을 모두 외워야한다. 누가 그 많은 글자들을 어떻게 다 외고 새겨서 일상생활에 사용할 수 있을까? 한자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오로지 그 글자만을 위한 삶을 살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쓸 수 있는 글자만 아는 것도 수천 자일 텐데, 늘 먹고사는 일에 쫓기는 백성들에게 그런 한가한 시간이 날 턱이 없다. 삶에 쪼들리지 않는 특권층이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글자일 뿐이었다. 소리는 한정되어 있지만 뜻은 매일매일 생긴다. 왕은 생각했다. 지금 백성들이 말하는 대로 쓰고, 그 말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글자를 만들겠다고. ‘스물여덟자의 글자를 사용해 세상의 말을 모두 쓸 수 있게 한 것이다. 세상의 만물이 드러내는 소리 그대로 쓸 수 있는 소리글자.

간략하고 전환이 무궁무진해서 정묘하기 이를 데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깨우칠 수 있을 것이며, 어리석은 자라 하더라도 열흘이면 족히 배워서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게 될 것이고, 이로써 민원을 제기하면 관리가 능히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능히 스물여덟 글자만으로도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며, 바람소리부터 시작해 학의 소리 닭의 울음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백성의 말이 글자()가 되어 왕 앞에 이르고 왕의 말(교지)이 백성에게 알려지게(저자거리에 방으로 붙여지면) 될 것이다. 왕의 뜻은 그랬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는 그의 회고록에 조선에 와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고 썼다. 하나는 한글을 배운지 4일 만에 읽고 쓸 수 있었고또 하나는 조선인 스스로 만든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업신여기는. ’이 세상에 이보다 더 간단하게, 이보다 더 과학적으로 발명한 문자 시스템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그의 논문의 결론에 주장하기도 했다.

훈민정음연구로 학위를 받은 미국인 동아시아학자 게리 레드야드는 글자꼴에 그 기능을 관련시킨다는 착상과 그 착상을 실현한 방식에 정녕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오래고 다양한 문자사에서 그 같은 일은 있어본 적이 없다. 소리 종류에 맞춰 글자꼴을 체계화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이것은 견줄 데 없는 문자학 적 호사다.”라고. 그러나 조선의 유학자들은, 너무 간단하고 쉬워서 누구나 읽힐 수 있다며 훈민정음을 반대한다.

언문을 제작하는 것은 지극히 신묘하시어,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참으로 천고에 뛰어나십니다. 하오나 신 등의 좁은 소견으로는 감히 의심나는 점이 있사와 간곡한 정성으로써 그 뜻을 열거하오니, 삼가 헤아려 주시기 바라옵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대표로 연명한 상소가 날아들었다. ‘조선은 예로부터 지성으로 중국에 사대하여 언제나 같은 제도와 문물과 글자를 써 왔다. 그 음()과 합자(合字)의 방식은 모두 중국의 것과 어긋난다. 그러니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운 일이다. 몽고· 티벳 ·여진·일본 등의 몇몇 오랑캐나라만이 글자를 만들었다. 설총의 이두는 모두 중국에서 빌어온 한자를 썼기에 문자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부득이 글자가 필요했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중국에서 통용되는 문자를 습득하여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한다. 과거시험을 언문으로 하면 언문만을 공부하고 한문은 돌보지 않아 관리의 질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언문은 다만 새롭고 이상한, 왕께서 즐기는 장난 정도로 여기시는 것이 ...사람 목숨과 관련된 조항을 언문으로 써서 널리 알리면 억울한 형벌에 복종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하여 그 유익함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것은 관리들의 공평치 못한 처사에 달려있지, 그것은 백성이 말과 글을 몰라서 생기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언문을 시행하려면 문무백관과 의논을 구하지 않고 어찌 지체 낮은 몇몇 관리들에게 일을 시켜 반포하는 일은 후세에 부끄러운 일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데도 이롭지 않을 것이며, 언문이 설령 유익하다 할지라도 한낱 선비의 기예에 불과하다고. ’ 사대가 뿌리 깊게 몸에 밴, 사대부들의 반발은 예상대로 거셌다. 그들의 반대이유가, 글자를 만들게도 했지만 왕의 생각은 한문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한문이 아니라 원하는 백성들은 누구든 볼 수 있도록. 관리의 공평치 못한 처사만으로 백성들은 억울한 게 아니라 애초에 있지도 않은 죄를 당하는 일을 없도록. 법령은 조문에 있었지만 관리는 형편에 따라, 적용하고, 자신의 심정에 따라 죄를 물었다. <삼강행실도>를 언문으로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라 이르니 사람의 행실이 바르고 안 바르고는 그 사람의 타고난 자질에 달려 있지, 어찌 한두 권의 책으로 고쳐지겠습니까? 오래전에 <삼강행실도>를 민간에 널리 배포했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충신 효자 열녀가 나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새로이 만든 글자로 번역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사대부들이 공경하는 성리학의 교본을 언문따위로 번역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우러르는 도덕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 명분의 허망함이 알려지면 안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왕은 그들의 상소에 한글로 죄목을 적어 의금부와 승정원에 내렸다. 글을 읽힌 백성은 직접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하연) 정승아, 또 공사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벽에 붙이기도 했다. ‘홍길동으로 태어남은 운명이 아니다.’ 인간의 주된 모습은 그가 태어나는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자신의 의지의 활동 내용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도성을 비울 때는 말없이 떠난 선조가 전쟁에 참여하라고, 왜적에게 투항한 백성들에게 돌아오라는 내용을 담은 한글교서를 내리기도 한다. 왜 한글인가?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면서도 양반들은 빈 땅을 빌려주지도 않았다. 구휼미가 나와도 백성들은 굶어죽고 구휼미를 얻어도, 갚지 않는다며 맞아 죽었다. 부당한 질문에 언제나 시달려야 하는 게 약자이다. 왜 나라를 구하지 않느냐고? 누구의 나라인가? 이제 그들의 명분은 무엇인가? 왕은 백성과 더불어 가기를 원했다. 누구를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대부들 역시 왕에게는 백성이다. 사대부들의 생각은 달랐다. 왕의 권력은 나누면 함께 할 수 갈 수 있지만 사대부들이 지켜야 할 것은 영역이기에 나누면 무너진다. 그래서 자신들의 자식인데도 적서로 나누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은 가치를 가진다. 한자의 수가 많을수록 그 뜻을 아는 자들은 존경의 대상이 된다. 판사의 판결문이 그렇고 의사의 처방전이 그렇다. 이제 그 지역이 개방되고 희소성이 약해지려고 한다. 언문으로 노비가 과거급제를 했고, 이제 사서오경이 언해될 것이다. 결국 최만리 등의 걱정은 그것이었음을 말한다. 더 이상 구별짓기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문이 더 이상 그들만의 세상을 유지시킬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없음을.

고려왕조가 무너져도 그 백성들은 지금 왕 앞에 있다. 자신의 나라 조선에, 다시 백성으로 있다. 왕 자신이 사라져도, 어쩌면 조선이 무너지고 또 다른 어떤 나라가 세워져도 이 백성이 있을 것이다. 왕에게는 백성이 있어야 한다. 권력은 백성이 있어야 생긴다. 그러니 그 백성을 알아야 하고 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백성이 똑똑해지기를 바래야한다.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이나 불, 호랑이나 표범보다 훨씬 두려운 것인데 윗자리에 있는 자들은 백성을 업수히 여기면서 모질게 부려먹는다.” 백성의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서얼이라며 차별하는 당시 사회의 병폐를 비판하며 허균은 언문으로 소설을 썼다, <홍길동전>. 한글은 권력의 이동을 암시한 혁명적인 문자임을 알게 해준, 혁명적인 소설이다. 

글자를 안다는 것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글쓰기를 하는 것은 내 생각을 표현하지만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게 한다. 때론 자기 자신을 바꾸기도 하는 치명적인 무기이고 도구인 것이다.


(글/김정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