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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은 삶(글/황민재)

2018.01.30 08:12

관리자 조회 수:595

육이오 전쟁이 난 후 여러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부모도 형도 죽고 재산도 모두 없어지고 나와 어린 동생만 간신히 살아남아 동생은 육이오 전에 출가한 누님 집으로 가고 나는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작은 섬의 큰아버지 집으로 갔다. 몇 해 전에 광주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여름 방학에 갔을 때 그렇게 환대해 주던 친척들이 완전히 달라졌고, 나를 대하는 이상한 눈초리가 전율을 느끼게 했다.


나는 견딜 수 없어 큰아버지 집을 나와 그 섬 서쪽 끝에 있는 숙식이 가능한 염전으로 가서 염부가 되었다.

그리고 이년 후 1956년 서울에 왔다. 염전에서 월급으로 모은 돈으로 우선 사글세방을 얻고 매일 그 때 한참 부산 피난생활을 하다 올라와 새로 집을 짓는 피난민들의 건축 현장에서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했다. 주로 미장공 조적공 목수의 조수일 이었다. 점심은 기계로 누른 보리쌀로 지은 밥을 양은 사발에 담아 단무지 몇 조각을 얹고 그 위에 종이를 덮어 무명 베 수건으로 잡아 묶어서 들고 다녔다.


지금의 충무로 세종호텔 뒤편 건축 현장에서 북아현동 한성여고에서 이화여대로 넘어가는 고갯길 오른편에 피난민들이 마구 지어서 사는 집 방한 칸을 사글세로 얻어 살았고 매일 걸어 다녔다. 그렇게 피로에 지쳐 터덜터덜 걷다보면 길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행복해 보였고 내 처지는 너무 처량해 보였다.


그럴 때면 불현 듯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졌다. 머슴도 둔 중농인데다 한약방까지 겸하고 있어서 그런대로 여유가 있었고 그 동네에서 대도시의 중학교에는 나와 한 명의 선배 두 사람뿐이었고 어머니는 나에게 그때로는 매우 귀하다는 명주이불도 해 주셨다.


늦가을이면 소리꾼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 바깥마당에 멍석을 여러 장 깔아 놓고 동네 사람들과 밤늦게까지 판소리를 즐겨 듣던 아버지는 왜 하필이면 사회주의에 물들어 가정도 완전히 무너지고 본인을 물론 형님도 죽게 하고 그 혼란 속에 어머니마저 병사하고 어린 동생은 출가한 누님 집으로 가고 나도 겨우 목숨만 건져 오늘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나 하는 원망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랐다.


더욱이 얼마 전에는 목수 조수일을 하고 책임자 집에 임금을 받으러 갔다가 쫓겨 나와서 그 빨갱이 딱지 때문에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울면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건축 현장에서는 주위 사람들이 저 사람은 왜 맨날 얼굴이 어둡고 그늘이 져 있느냐며 수군거렸다. 그렇다. 나는 그 때 웃음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옷도 언제나 밝지 않은 어두운 색으로 입었다.

그날도 일이 끝나고 터덜터덜 걸어오다 큰 길 건널목에서 잠깐 기다리는데 길 건너 저쪽에 열 살 안팎의 칠팔 명의 떼거지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소네 미제분야 깡통을 뚜껑을 떼어내고 굵은 철사로 손잡이를 만들어 손목에 걸고 있었다. 건널목을 건너며 옆으로 지나치는 그들의 몰골들은 말할 수 없이 처량했고 그들의 손목에 걸고 있는 깡통에는 반 토막의 숟가락이 들어있어 짤랑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그들과 지나쳐 저쪽으로 건너나 한참을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편식이던 나에게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따로 만들어 옆에 앉아서 먹으라고 채근하였고 밖에 나갔다 오면 대야에 물을 떠다놓고 씻겨주었고, 자주 새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대도시를 중학교로 보내주었다. 조금 전 그 떼거지들보다 몇 십 배의 축복 속에 살았다는 생각이 들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많이 사라졌고, 이만큼까지 나를 키워주었으니 나는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자각이 들었고, 지금부터의 내 운명은 내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그날 이후 건축 현장에서 나의 태도와 표정은 옆에서 알아보게 달라졌다.

일이 끝나면 여느 때와 달리 빠른 걸음으로 걸었으며 도중에 그 때의 평화신문사 앞의 유리 상자 속의 그날의 신문을 다 읽고 자취방까지 갔다.


그리고 칠월이 되어 날씨가 더워졌고 얼음과자 장사가 괜찮다고 하여 얼음과자 장사를 시작했다. 남대문 옆의 얼음과자 집에서 백 개씩 얼음과자를 넣은 참석통을 큰 통 안에 넣고 그 주위를 얼음으로 채워 녹지 않게 했다. 꽤 무거웠다. 그 통을 메고 서울역 뒤쪽, 만리동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아이스케~, 아이스케~하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노동에 비해 아침에 조금 늦게 나가도 되었고 수입도 훨씬 많아서 어떤 날은 노동 하루 임금보다 배가 많은 날도 있었다. 그리고 덤으로 장사의 묘미도 터득했다.


어느 날 만리동 골목에 있는 구멍가게 아저씨가 나를 불러 얼음과자 하나를 팔아주며 당신의 외치는 소리는 꼭 흥에 겨운 노랫소리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제까지와 달리 나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더위가 가시어 나는 구월 달부터 노동판에 나가 그 해 연말까지 집안에서의 마무일까지 끝냈다. 그리고 다음해부터 조선호텔 앞에 북창동 진달래라는 이름의 다방 앞에 노점 장사를 시작했다. 칠개월 후 이동식 점포를 마련하여 무교동 인도에서 잡화장사를 했다.


이년 후에는 종로 낙원시장 입구에 점포를 마련하여 과자 중간 도매상을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오 년 후 강원도 탄광지역에 주유소를 세웠고 다시 오 년 후 정착이 된 주유소를 동생에게 맡기고 서울에 와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남들이 의아해 할 만큼 사업을 키우기로 했다. 또한 굴곡도 많았다. 견디기 힘든 어려움도 있었으나 아무리 어려워도 나의 표정이나 언행에 조금도 그런 흔적이 없이 주위의 사람들이 곡해할 정도였다.

매월 일회 전체 사원 조회를 했고, 매년 초 조회 때는 나는 직원들에게 꼭 이 말을 했다.


자기의 현재를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축복 받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