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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4>알 권리 막는 공공언어 
의사, 그들만의 언어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응답하라 1994’ 마지막 회. 남자 주인공인 신경외과 의사 쓰레기(정우 분)는 허리 부상으로 입원한 연적 야구선수 칠봉이(유연석 분)의 자기공명영상(MRI)을 이렇게 진단했다.

“룸바 스파인 엠알아이 검사상 엘포-파이브 에스원 사이 디스크 에이치엔피 소견입니다. 우선 피티나 컨저버티브 매니지먼트를 하면서….”

국내 드라마, 수입 드라마를 막론하고 의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공통점은 자막이 항상 등장한다는 것이다. 외계어로 느껴질 만큼 난해한 영어로 된 의학용어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우리 의사들이 영어로 대화하는 건 현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 오히려 “허리뼈 MRI상 4, 5번 허리뼈와 1번 엉치뼈 부분에 디스크 증세가 있네요. 우선 물리치료나 완화 치료를 하면서…”라며 쉽게 설명하는 의사보다는 쓰레기 같은 의사가 더 많은 게 우리 의료계의 현주소다.


○ 어려운 영어단어에서 우월감 느껴

왜 우리 의사들에겐 ‘심장정지’라는 우리말보다 ‘카디악 어레스트(Cardiac arrest)’라는 영어가 더 익숙한 걸까. 의료계에선 “현대의학의 뿌리가 서양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19세기 개항 직후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급속도로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 의학용어를 우리말로 순화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어 의학용어뿐만 아니라 일본식 한자어, 독일어, 심지어 라틴어 단어까지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의사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의사들의 우리말 용어 사용 의지 자체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의학용어 순화사업은 이미 대한의사협회에서 1976년 시작했다. 순우리말 사용을 권장하되 쉬운 한자어의 병용도 허용했다. 그 결과 총 5만7246개의 의학용어가 우리말로 순화됐고 1977년 의학용어집 초판 발간 이후 네 차례나 개정판이 나왔다. 그럼에도 의료계에선 영어 용어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건 의사 상당수가 영어를 사용하면서 ‘전문직’으로서의 우월감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물론 치료 측면도 있다. 서울시내의 대형병원 내과 과장 A 씨는 “환자들이 알 수 없는 영어단어를 사용하면 ‘환자보다 내가 위’라는 느낌을 받는다”면서 “한편으로는 의사의 권위가 높을수록 환자들의 복약 순응도(환자가 처방에 따라 약을 복용하는 정도)와 신뢰감을 높일 수 있어 치료에도 효과적이다”고 주장했다. 또 말기암 및 정신병 등의 질환 처럼 본인이나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어려운 의학용어로 의료진이 대화하면 이에 대한 노출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환자들은 의사의 과도한 영어 사용이 불안감을 가중시킨다는 반응이 많다. 지난해 두 살짜리 딸이 진주종(만성 중이염의 일종)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는 주부 이모 씨(32)는 “동네 의원 의사가 콜레스티아토마(cholesteatoma)만 알고 이 병의 우리말 이름인 진주종을 헷갈려 하는 걸 보고 엄청 불안했다”면서 “위화감은 둘째 치고 이 병을 제대로 알고 치료를 해주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의사들이 과도한 영어 용어 사용을 고집하는 데는 변화를 꺼리는 의료계의 보수적 성향도 한몫한다. 가령 학회 발표에서 영어 단어가 아닌 대중적 용어를 사용할 때는 “격이 떨어진다”는 핀잔을 듣는 경우도 있다는 것. 은희철 서울대병원 피부과 교수는 “특히 자기 전문과목 용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는 일을 시작하면 그 과목 의사들의 반발이 매우 심하다”며 “이는 마치 조선시대 양반이 훈민정음을 놔두고 300년 넘게 한자 사용을 고수하며 지식과 권위를 독점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비판했다.


○ 의사 양성과정부터 우리말 용어 교육 필요

영어 일변도의 의학교육 역시 용어 순화를 저해하는 원인이다. 현재 국내 대다수 의과대학과 의학전문대학원은 영문 원서를 교과서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거나 국내 학자가 직접 지은 교과서가 상당수 존재하지만 오역과 비실용성 등을 이유로 학생과 교수들 스스로 사용을 꺼리는 실정이다. 의대 4학년 서모 씨(26)는 “우리말 교육에 적극적인 교수님이 강의한 해부학교실을 제외하곤 본과 2학년까지 90학점이 넘는 수업을 모두 영어로 된 교과서와 강의록으로 배웠다”며 “졸업 후 환자를 직접 상대하기 위해선 국내 용어도 잘 알아야 하는데 솔직히 걱정”이라고 말했다.
 
우리말 의학용어 정리 작업을 벌이고 있는 여러 단체 간의 의견차 역시 영어 용어의 우리말 순화를 저해하고 있다. 현재 의학용어 순화작업은 의협, 대한민국의학한림원, 대한의학회 에서 따로 하고 있다. 문제는 단체별로 입장차가 크다는 것. 예를 들어 의협이 ‘뼈엉성증’이라는 순우리말을 선호하는 반면 한림원은 ‘골다공증’처럼 잘 알려진 한자어는 그대로 써야 한다는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은 교수는 “3개 단체가 따로 의학용어 순화에 나서다 보니 현장 의사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영어를 써야만 혼선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라며 “3개 단체의 기능을 하나로 통합하고 우리말 의학용어의 통일성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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