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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90604000412


좌영길의 현장에서 - 사회섹션 법조팀장


다음은 대법원 판결문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난해하지만,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한 번 읽어보자.

과세표준과 세액을 증액하는 증액경정처분은 당초 납세의무자가 신고하거나 과세관청이 결정한 과세표준과 세액을 그대로 둔 채 탈루된 부분만을 추가로 확정하는 처분이 아니라 당초신고나 결정에서 확정된 과세표준과 세액을 포함하여 전체로서 하나의 과세표준과 세액을 다시 결정하는 것이므로, 당초신고나 결정에 대한 불복기간의 경과 여부 등에 관계없이 오직 증액경정처분만이 항고소송의 심판대상이 되는 점, 증액경정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항고소송에서 증액경정처분의 위법 여부는 그 세액이 정당한 세액을 초과하는지 여부에 의하여 판단하여야 하고 당초신고에 관한 과다신고사유나 과세관청의 증액경정사유는 증액경정처분의 위법성을 뒷받침하는 개개의 위법사유에 불과한 점, 경정청구나 부과처분에 대한 항고소송은 모두 정당한 과세표준과 세액의 존부를 정하고자 하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불복수단으로서 납세의무자로 하여금 과다신고사유에 대하여는 경정청구로써, 과세관청의 증액경정사유에 대하여는 항고소송으로써 각각 다투게 하는 것은 납세의무자의 권익보호나 소송경제에도 부합하지 않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납세의무자는 증액경정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항고소송에서 과세관청의 증액경정사유뿐만 아니라 당초신고에 관한 과다신고사유도 함께 주장하여 다툴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어떤 분은 ‘칼럼을 날로 먹는다’고 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이유가 있다. 소개한 내용은 700자나 되는 긴 분량인데, 놀랍게도 단 한 문장으로 쓰였다. 이 기다란 문장에 거부감이 없다면, 아마 읽는 이가 법조인일 확률이 매우 높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숨 넘어가는 문장을 쓰지 않는다.

법률가들은 문장을 해체하는 데 무척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법서에는 주어와 술어가 몇겹인 복문이 수시로 나온다. 이런 책을 대학 4년간 읽고, 고시공부도 한다. 사법연수원을 거치고, 실무를 맡아 서면을 작성하면서 난해한 구조의 문장과 너무 친해진다. 아무리 복잡한 문장을 봐도 금방 내용을 이해한다. 하지만 법조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복문을 보면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특히 마침표 없이 쉼표로 문장을 이어붙인 ‘마라톤 문장’은 읽다가 지치게 마련이다.

일반인만 판결문이 어렵다고 느끼는 게 아니다. 몇 년 전 서울 시내 로스쿨 재학생 1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판결문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 가량이 ‘자주 어렵다고 느낀다’고 답했다. ‘가끔 어려움을 느낀다’는 답까지 합하면 97%가 부정적인 응답을 냈다. 주목할 부분은 판결문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70%가 ‘어려운 전문용어’가 아닌, ‘지나치게 긴 문장’ 때문에 판결 내용을 알기 힘들다고 답했다. 92%는 ‘판결문이 쉽게 쓰여질 수 있는데도 어렵게 작성된다’고 답했다.


문장을 하나 더 읽어보자. ‘현재 우리나라에서 상표의 출원 및 그 심사의 과정에서 출원인이 위치상표라는 취지를 별도로 밝히는 상표설명서를 제출하는 절차 또는 위 지정상품의 형상 표시는 상표권이 행사되지 아니하는 부분임을 미리 밝히는 권리불요구절차 등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아니하다는 사유는 위와 같은 위치상표의 인정에 방해가 되지 아니한다.’ ‘아니하는’, ‘불요구절차’, ‘마련돼 있지 않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등의 부정어를 4중으로 사용하면서 의미전달을 어렵게 하고 있다. 역시 잘라 쓸 수 있는 문장을 하나로 길게 쓰다 보니 구조가 복잡해졌다.

인용한 판결문 문장은 모두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선고한 사건에서 가져왔다. 물론 판결문은 재판 당사자를 대상으로 쓴 글이고, 그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면 되겠다. 판결의 완결성을 고려하면 최대한 상세히, 정확한 전문용어를 쓰는 것도 불가피하다. 하지만 판결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면 일종의 행위준칙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긴 문장을 잘라서 쓰는 정도는 큰 무리 없이 법원이 해줄 수 있는 서비스가 아닐까. 특히 법률심인 대법원 판결문은 더 그래야 할 필요성이 크다.


문장이 난해한 복문인지는 쓸 땐 잘 모른다. 애매하면 소리내서 읽어보자. 눈으로 읽으면 머릿속에서 문장을 해체하고 주어와 술어를 짝지을 수 있는 문장도, 소리내 읽으면 혀가 꼬일 때가 적지 않다.

좌영길 사회섹션 법조팀장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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