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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의 국어학자 이수열 선생은 매일 새벽 신문을 펼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수술’을 위한 준비작업이다. 수술대에 오른 글의 필자에게는 며칠 뒤 편지가 배달된다. 수술 자국이 선명한 자신의 글이다. 이 선생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과 글이 곧 정신”이라고 말했다. 더 손볼 데가 없나, 이 선생이 ‘수술’을 마친 신문 칼럼을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이수열 선생은 1928년 2월생이다. 한달 뒤면 만 구순이다. 책을 읽기도, 글을 쓰기도 버거울 연세다. 그러나 이 선생의 삶은 아직 뜨겁다. 요즘도 매일 새벽 신문을 펼쳐 든다. ‘수술’을 위한 준비작업이다. 돋보기 너머 각종 칼럼을 꼼꼼히 읽고 문법에 맞지 않는 단어나 표현을 잡아낸다. 이 선생은 이 작업을 ‘수술’이라고 부른다. 수술대에 오른 글의 필자에게는 며칠 뒤 어김없이 편지가 배달된다. 빨간펜의 수술 흔적이 선연한 자신의 글이다.

벌써 25년째다. 1993년 2월 서울여고 국어교사를 정년 퇴직한 이후 시작한 인생 2막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교사 시절에도 헌신했던 국어순화 운동의 연장일 뿐이다. 세밑 서울 불광동 자택을 방문해 감사 인사부터 했다. 기자도 이 선생에게서 편지를 받은 터였다. 우리말을 비교적 바르게 쓴다고 자부하던 기자의 글도 수술 자국 투성이였다. 이 선생의 직함은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이다. 솔애울은 이 선생의 고향 파주의 마을 이름이다.

-힘들게 왜 이런 일을 하시나.

“아무것도 안 하면 심심하지 않나. 소일하는 거지.” 거창한 명분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저 시간 때우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틀린 단어, 잘못된 표현과 씨름하는 고된 작업이다. 작업량도 적잖다. 금세 떨어지는 우표가 말해준다. 200장을 사다놓으면 보름 만에 없어지기도 한다. 때로 반박과 항의도 받는다. 그럼에도 구순이 되도록 ‘메스’(빨간펜)를 놓지 않는 것은 우리말에 대한 뚜렷한 소신과 역사적 통찰 때문일 것이다.
“왜놈들이 어떻게 했는 줄 아나. 우리말 연구하는 사람들을 40여명 잡아갔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고문으로 학자들이 죽었다. 우리말을 연구한 죄로. 왜놈들이 왜 그랬나. 민족혼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 선생은 “글이란 한 민족의 얼”이라고 했다. 그러니 “우리말을 바르게 지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는 게 이 선생의 생각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일제 경찰은 조선어사전 편찬에 가담하거나 협력한 이들을 ‘치안유지법’상의 내란죄로 몰았다.

-요즘 글에 잘못된 표현이 많나.

“아주 많지. 누구나 말은 하지만 말답게 하기는 어렵다. 말이 곧 글이고. 교사로 재직 중엔 교과서에 잘못된 표현도 많이 고쳐서 교육부 편수국에 보내곤 했지. 전화로 상의도 하고 편수관과 싸움도 엄청 했다.”

이 선생의 기준은 매우 엄격하다. 3인칭 대명사로 쓰이는 ‘그녀’나 ‘그’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원래 우리말이 아니라는 게 이유다. ‘그녀’는 일본말 ‘가노조’(かのじょ·彼女)를 그대로 직역한 말이다. 문인 김동인이 신문학 초창기인 1919년경 처음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노조는 그 사내의 계집이란 뜻이다. 말의 됨됨이가 남녀 평등이 아니다. 여자는 남자의 종이라는 성차별적 의식이 들어 있다. 그런 말을 써서야 되겠나.” 이 선생은 “말과 글이 곧 정신”이라고 했다.

-기자들이 흔히 잘못 쓰는 말은 뭔가.


“무슨 무슨 입장이다, 이렇게 쓰는 거다. 입장(立場)도 우리말이 아니다. 일본말로 서 있는 장소, ‘다치바’이다. 우리말로 쓰려면 ‘∼처지에 있다’, 이렇게 써야 한다. 방송 뉴스에서 ‘유명세를 타다’는 말도 많이 쓰던데 난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런 말은 없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유명세(有名稅)란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탓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이나 불편을 세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유명세는 ‘타는’ 게 아니라 ‘치르는’ 것이다.

이 선생의 지적은 꼬리를 문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야 한다’는 말도 틀린 말이다. ‘서로’는 부사이므로 격조사를 붙일 수 없다.” ‘서로 위해야 한다’로 고쳐야 한다는 게 이 선생의 지적이다. “예전에 누가 ‘한 번 부사는 영원한 부사냐, 부사가 무슨 해병대냐’고 따지기에 그랬지. 영원한 부사라고. 해병대보다 더 영원하다고.”

이 선생이 워낙 완고한 원칙주의자이다 보니 반론에 부닥치곤 한다. 언어도 고정불변이 아니라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진화하는 게 순리 아닌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이 선생이 결연히 반대하는 대명사 ‘그녀’나 ‘그’, ‘유명세’와 같은 단어들이 진작 실렸다. 그럼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때때로 충돌한다.

“문화부 장관 했던 이어령씨가 한 일간신문에 ‘말’이란 제목으로 50회에 걸쳐 글을 쓴 적이 있다. 영어를 많이 섞어서 썼더라. 그래서 고쳐서 보내줬지. 그랬더니 다음편에 ‘이런 국수주의자가 다 있다’라면서 반론을 폈어. 그런 걸 섞어 써야 우리말이 풍성해진다나. 그러면서 그렇게 순수를 외치는 자가 왜 ‘국민학교’ 명칭에 대해선 말이 없냐고 하데. 그래서 ‘당신 참 좋은 말 했다. 당신 문화부 장관 할 때 뭐했냐. 그때 뭐하고 있다가 사돈 남 말 하듯 하느냐’고 했지. 정년퇴직한 교사들이 건의는 많이 했었거든.”

반대로 감사 인사를 받는 경우도 적잖다. “서울대 교수의 글이었는데 잘못된 표현을 고쳐 보냈더니 ‘다음부터는 제 글의 교열을 부탁한다’고 하더라. 부담돼서 못한다고 했다. 이후에도 그 교수가 ‘존경하는 분이 돌아가셨는데 조사를 썼다. 고쳐달라’고 글을 보내 고쳐주기도 했지.”

-어떻게 국어와 연을 맺게 됐나.

“국민학교(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주경야독해 교원 자격 검정고시를 봤는데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을 달달 외워 합격했다. 분량으로나 권위로나 최고였다. 국어교사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순간부터 국어는 나에게 한평생 같이할 생명이 된 거지.”

-언제까지 하실 건가.

“나이 90인데 다했지, 뭐. 시력이 약해져 너무 힘들어. 무엇보다 혼자 해가지고는 효과라는 게 창해일속(滄海一粟), 바닷속 좁쌀과 같아. 그래서 얼마전 문체부에 탄원서를 냈다. 나 홀로 20여년 했는데 아무리 해도 효과라는 게 안 보이니, 이건 국가가 해야 한다고. 법부터 강화해야지. 지금 국어기본법이라는 게 있기는 한데 그 법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있나. 법 이름부터 국어보호법, 국어정화법이라고 바꿔야 한다.”

이 선생의 원칙을 그대로 따르기는 쉽지 않다. 당장 ‘그’라는 대명사를 쓰지 않고 글을 쓰기가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말을 바르게 쓰자는 주장을 외면할 수도 없다. 외면하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따르자니 글쓰기가 불편해진다. 원칙과 현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나, 둘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해야 하나. 이 대목에선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의 촌평이 도움이 될 듯하다.

“말에 관한 한 나는 현실주의자이지만, 선생의 순결주의 같은 든든한 의지처가 있어야 현실주의도 용을 쓴다. 선생의 깊은 지식과 열정은 우리말의 소금이다. 이 소금이 너무 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쳐 생각한다. 소금이 짜지 않으면 그것을 어찌 소금이라 하겠는가.”

이 선생의 일생을 기록하면서 각별히 신경 썼다. 국어순화 운동에 평생을 바친 이의 삶을 논하는 글에서 오염된 언어를 써서야 되겠는가. 그럼에도 글을 마무리하면서 은근히 걱정된다. 이 글이 다시 이 선생의 수술대에 오르는 것은 아닌지.

류순열 선임기자 ryoosy@segye.com
사진=이재문 기자


출처:세계일보

이수열은

●1928년 경기 파주 출생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 후 조선타이어 공장 노동자, 문화학원 급사로 일하며 주경야독 ●16세에 국민학교 교원자격 시험 합격 ●1944년 파주 봉일천 국민학교에서 교생 실습 ●1969년 중등교원 채용고시 합격 ●용산중, 서대문중, 면목고, 서울여고 국어교사 재직 후 1993년 2월 정년퇴임 ●2004년 한글학회·문화관광부 장관, ‘우리글 지킴이’ 위촉 ●現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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