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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1443년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대왕의 철저한 비밀 전략이었고 단독 힘이었지만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은 놀라운 집단 지성의 결과였다.

그 집단 지성은 세종과 그를 도와 해례본 저술에 참여한 8인(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의 힘이었고 8인 가운데 실질적인 중심 역할을 한 이가 보한재 신숙주였다. 1971년 한글학회가 사적비를 통해 그의 훈민정음 업적을 높이 기린 지 46년이 흘렀지만 2002년 문화의 인물로 지정된 것 외는 그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크게 바뀌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은 보한재 탄신 600돌을 맞이하여 신숙주가 음운학자로서 남긴 업적을 재조명하여 그의 업적을 온전히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음운학자로서의 신숙주 열정은 그의 시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1)
치, 설, 아, 순의 발음 아직도 익숙지 못하니
중국 사신 길 기이한 글자를 묻는 헛걸음 되었네.
삼경의 초생달에 고향 생각 떠오르고
한때의 훈훈한 바람 나그네 시름 흔드누나
요동 하늘에 먼지이니 먼 시야 희미하고
골령에 구름 걷히니 푸르름 드러나네.
소매 속에서 때때로 제공들의 글을 보며
되는 대로 흥얼대니 작별의 설움 새로워라


(2)
기 있으면 반드시 형이 있고
형 있으면 반드시 소리가 있네.
음과 양이 서로 닿이고 부딪쳐
소리가 따라 생기는구나.
서와 북은 음이 중하여
소리가 목과 혀에서 나고
동과 남은 양의 위치라서
소리가 입술과 이에서 나온다네.
소리는 본래 곳에 따라 옮기나니
말로서 중국과 오랑캐를 분간할 나위 없네.
우리 임금이 언어의 의의를 중히 여겨
예악·문물을 열었어라.


시 (1)은 황찬을 만나러 요동 가는 길에 성삼문과 주고받은 시다. 훈민정음 해설을 위해서는 중국 성운학(음운학)에서의 초성 체계를 어떻게 적용하고 응용하든 그것에 대한 연구는 필수다. 이에 대한 연구를 위해 황찬을 만나러 가는 것인 만큼 음운 분류에 대한 고뇌가 ‘치음, 설음, 아음, 순음’이란 시구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 (2)는 해례본에서 음성과학과 음양오행 철학을 동시에 적용했는데 바로 이 시도 그런 융합적 연구 과정에 대한 소회를 담고 있다.

더욱 두드러진 음운학자로서의 면모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 운회 번역,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직해동자습 등 훈민정음 보급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모든 책에 모두 참여한 것만 보아도 그 업적을 알 수 있다.

세종, 신숙주, 그리고 탈근대 언어관을 발전시킨 들뢰즈(1980)의 언어관을 살펴보면 몇 가지 닮은 점이 포착된다.

첫째, 보편적이면서도 획일적인 언어주의를 거부했다. 15세기 조선은 중화주의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사회였다. 한문은 중화주의의 절대 기호로 한자를 바탕으로 하는 이두문이나 구결문과 같은 변형은 가능해도 한자를 벗어난 그 어떤 문자도 용납이 안 되는 시대였다.


그래서 세종은 새로운 문자 창제를 비밀리에 할 수밖에 없었고 28자를 완벽하게 창제한 후 공표하고 훈민정음이 한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다목적용임을 보여주어 사대부를 설득하게 된 것이다. 이때 세종의 원대한 문자의 꿈을 가장 이해하고 공동 연구자로 우뚝 선 이가 신숙주이다.

세종 역시 정치적으로는 중국 명나라에 대해 사대의 예를 극진히 했다. 그러면서 우리식 천문 과학, 우리식 음악을 완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식 문자 창제에 성공했다. 천문과 음악의 표준을 정하고 그것을 만백성에게 나눠 주는 것은 중국 황제의 특권이었다. 세종과 신숙주 등은 그런 시대적 절대 한계를 극복하고 마치 게릴라처럼 하나하나 중국과 다른 문화대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세종은 기본 문자소(모음 세 자, 자음 다섯 자)를 가장 단순한 직선, 점, 원이라는 도형 배치를 통해 온갖 소리를 역동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생성 문자를 창출했다. 모음 기본자는 천지자연의 우주를 본뜨고 자음 기본자는 작은 우주인 사람의 발음기관을 본떠 큰 우주와 작은 우주를 접속시켜 음소 문자이면서 음절 단위로 모아쓰는 전무후문한 문자 짜임새(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또한 모음에는 음양 이분법과 천지인 삼분법을 동시에 배치하고 자음에는 오행과 오시와 오방, 오음 철학을 적용과 과학과 이질적인 철학이 만나 조화로운 문자의 생성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최소의 자음과 모음이 최소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통해 최대의 글자를 생성해 내는 문자 생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한글의 생성적 배치 원리는 다양한 손전화에서 다양한 배치 효과로 나타난다


1444년 2월 최만리를 비롯한 6인의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보급을 반대하자 세종은 “그대들은 운서를 아시오.”라고 호통을 쳤다. 중국 한자와 한자음 사전인 운서 연구는 훈민정음 연구의 바탕이었다. 홍무정운 역훈은 훈민정음으로 발음을 기록한 책으로 훈민정음의 놀라운 기능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이미 훈민정음 창제 직후 세종은 신숙주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운회 주음을 지시했고 해례본 간행 2년 두인 1448년에는 우리식 표준 운서인 ‘동국정운’을 펴냈던 것이다.

신숙주는 동국정운 머리말에서 “이제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하나의 소리라도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정음이 음을 전하는 중심 줄이 되었다.” 라고 하면서 “아아, 소리를 살펴서 음을 알고, 음을 살펴서 음악을 알며, 음악을 살펴서 정치를 알게 되나니, 뒤에 보는 이들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로다”라고 감동을 적고 있다. 신숙주는 동국정운 편찬 대표로 참여한 것만으로도 훈민정음 보급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중국 황제와 지식인들이 중국 한자음을 적기 위한 고뇌가 담겨 있는 책이 운서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천 년 넘게 적지 못한 발음을 적을 수 있게 된 기쁨을 신숙주는 홍무정운역훈서에서 “우리 동방에서 천백 여년이나 알지 못하던 것을 열흘이 못 가서 배울 수 있으며,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되풀이하여 이를 해득하면 성운학이 어찌 자세히 밝히기 어렵겠는가(東方千百載所未知者. 可不浹旬而學. 苟能?潛反復. 有得乎是. 則聲韻之學. 豈難精哉.)”라고 적고 있다.

동국정운은 한자 18,801자와 정음 2205자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고대 한자부터 당시 쓰이는 조선의 한자까지 아울러 기술했다. 이는 동양의 보편 문자였던 한자와 한자음의 표준을 우리의 기준대로 세우고 발음 기호까지 정확히 적게 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세종 서문의 ‘유통(流通)’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과 글이 유통이 되고 말로서 유통이 되는 사람들이 글로도 유통이 되고 자연과 사람이 유통이 되고 이러한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조화로운 문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각각의 처한 곳에 따라 편안하게 할 것이지, 억지로 같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인데 그동안 “ 중국의 글자를 빌려 소통하도록 쓰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모난 자루를 둥근 구멍에 끼우는 것과 같으니, 어찌 제대로 유통하고 소통하는 데 막힘이 막았다는 것이다.[정음해례27ㄱ:1-3_정인지서]

정인지 서에서 “글자의 운으로는 맑고 흐린 소리를 구별할 수 있고 노랫가락으로는 음률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라고 훈민정음에 담겨 있는 음악 이치를 강조하는 것도 유통과 조화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신숙주는 홍무정운역훈에서 이런 역사적 의미를 “우리 동방에서 천백 년 동안이나 알지 못하던 것을 열흘이 못 가서 배울 수 있으며,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되풀이하여 이를 해득하면 성운학이 어찌 자세히 밝히기 어렵겠는가”라고 토로하고 있다. 이제 이런 정음을 바탕으로 학문도 하고 정치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기쁨을 동국정운서 마지막에서 신숙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 반포를 통해 인류 문자의 보편성(universality)을 이룬 셈이고 해례본은 집단 지성을 통해 그러한 보편적 이론과 이론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문자 체계를 제시한 셈이다. 신숙주는 그러한 문자의 이상을 위한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과 훈민정음 보급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셈이다.

한자로 이룩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명은 거대하고 위대한 역사였으나 가장 중요한 사람의 말소리를 정확하게 적지 못해 말과 글은 유통될 수 없었고 지식과 지혜는 일부만이 독점하는 반쪽 문명을 일궈왔다. 그러나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으로 하여 소리와 문자가 유통이 되고 그 소리와 문자를 누구나 유통하여 지식과 지혜를 열 수 있는, 소리 중심의 새로운 문명사를 열게 된 것이 ‘훈민정음, 동국정운’이었고 그 중심에 세종과 신숙주가 있었다. / 엄정권 기자

*

 신숙주 탄생 600돌 기념 학술대회가 10월 27일 열렸다. 신숙주의 여러 업적을 올바로 이해하고 업적들이 학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역사학자 한글학자 등이 발표했다. 이 기사는 '훈민정음·동국정운과 음운학자 신숙주' 발표 내용(김슬옹 박사)을 그대로 옮겼다. 학술대회 발표 내용을 4회 예정으로 싣는다.

엄정권 기자  tastoday@naver.com


출처: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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